[무보수전도자학교(64)] 마귀는 양심의 가책을 이용한다

등록날짜 [ 2013-07-23 09:30:55 ]

예수 피 공로 붙들고 죄에서 해방되었다면
더 이상 얽매이지 말고 멸망에서 벗어나야

우리에게는 사람이 지은 죄를 망각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흘린 피 공로를 붙들고 회개하면, 어떤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든 그 죄를 사해 주시고, 하나님의 기억 속에서 깨끗이 망각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붙들어야 죄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

양심의 가책에서 예수 그리스도 피 공로로 자유하라
예수께서 흘린 피 공로를 힘입으면 양심 속에 있는 죄까지 사함받아 자유로워진다는 복음의 진리를 모르는 자는 자기 양심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일례로, 가룟 유다는 죄 없는 스승 예수를 은 삼십과 바꾼 양심의 가책 때문에 스스로 나무에 목을 매어 죽었다.

“가로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저희가 가로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27:4~5).

이처럼 마귀역사는 양심의 가책으로 생각을 결박해 자살하게 한다. 또 우울증으로 억누르고, 대인기피증에 걸리게도 한다. 이처럼 마귀는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켜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에서 단번에 자유하게 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를 붙들고 호소할 때, 하나님께서는 어떤 중대한 죄든 다 용서하시고 그 죄를 망각하신다. 그 순간에 우리는 죄와 멸망과 저주에서 자유를 얻는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범죄한 자신이 뻔뻔스럽게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내 죄를 망각했다면, 아무 앞에서든 당당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더 이상 그 죄에 얽매여 자책할 필요가 전혀 없다.

지구에 70억 인구가 살아도 그들 중 누구에게도 양심의 죄를 심판할 권리는 없다. 그들에게는 인간의 영혼을 지옥이나 천국에 보낼 권리가 없다. 내 죄를 심판하거나, 눈같이 희게 망각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그분이 죄를 망각하셨다면 더 이상 그 죄에 억눌리며 살아갈 하등의 이유가 없다.

가룟 유다는 양심의 가책으로 죽었다. 우리는 양심이 가책을 받거든 빨리 예수 피 공로를 붙잡고 죄를 회개해야 한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두려워하지 말고, 죄지은 자를 정죄하고 회개한 자의 죄를 사해 주시는 절대자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마태복음 20장 28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다. 주님이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러 오셨다는 말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저들이 몰라서 그렇사오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간구했다. 예수께서 하신 기도 속에는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의 뺨을 때리고, 얼굴에 침을 뱉고, 채찍으로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고,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자가 지은 죄뿐 아니라 우리 인간이 지은 모든 죄가 다 들어 있다. 그러니 아무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린 피 공로를 붙들면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린다.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 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그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이다.

양심을 들고 하나님 앞에 가자
인간에게 양심의 가책이 있다는 점은 궁극적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가게 하는 장치다. 그런데 ‘나는 용서받을 자격도 없다’며 그 양심으로 자기 자신을 죽인다면, 양심대로 살다가 멸망하는 길밖에 없다. 사람들은 “양심대로 살라”고 말하지만, 사람이 양심대로 살면 결과는 멸망에 이르고 만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면 예수 피를 의지해 죄에서 용서함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양심을 기준 삼아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주장한다. “나처럼 양심껏 살아 보라”며 의기양양하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일은 인간의 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양심 앞에 나의 잘못된 양심을 털어놓고 고쳐가는 것이다. 인간에게 무슨 의롭다 할 만한 양심이 있는가.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양심에 도달해야 살 수 있다.

이사야 43장 25절에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양심의 가책을 무릅쓰고 망각하는 주님의 능력 앞에 호소하는 자는 양심의 자유를 얻어 구원을 받는다.

그래서 인간의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려 하면 아무도 만날 자가 없다. 자기 양심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 흠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하나님이 바라보실 때 인간은 모두 죗값으로 사망할 자뿐이다. 아무든지 하나님 앞에서는 양심이 고개를 들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양심을 들고 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죄를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신다고 하신다. 그러니 우리의 양심을 가지고 만날 이는 하나님밖에 없다. <계속>  

 *윤석전 목사 ‘무보수전도자학교’강의를 요약·정리한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34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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