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보수전도자학교(67)]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것들에 결박당하지 말라

등록날짜 [ 2013-08-13 09:16:07 ]

당장 죽을 일이 있어도 옳은 말을 할 담대함이 있어야
죄에서 벗어나 성령 충만으로 축복을 누리며 살아간다

가야바 안뜰에 모인 대제사장과 공회는 예수를 신성 모독죄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그들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과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렸다. 바로 그 시각, 가야바 바깥뜰에서 사태를 지켜보던 베드로를 비자(婢子) 한 명이 알아보고 “너도 예수와 한 당이지?” 하며 몰아세웠다. 베드로는 두려워서 벌벌 떨었다. 결국 두려움에 사로잡힌 베드로는 자기의 선생인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저주하며 부인했다.

베드로는 수제자로서 그토록 스승인 예수를 따랐으면서도 왜 자신의 신분을 당당히 말하지 못했을까? 이는 죽음의 위협 앞에서 양심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베드로에게 양심의 자유가 있었다면 “나는 예수의 제자다. 예수를 죽이려거든 나도 같이 잡아 죽여라” 하고 당당히 말했을 터다. 하지만 베드로에게는 그럴 만한 양심의 자유가 없었다.

양심의 자유가 있는 자는 담대하다. 우리는 지금 당장 죽을 일이 있을지라도 옳은 말을 담대하게 할 자유가 충만해야 한다.

예수를 부인하던 겁쟁이 베드로가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고 나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베드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살벌한 예루살렘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리고는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을 술 취했다고 조롱하는 유대인, 즉 세계 각국에서 와서 예루살렘에 거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큰소리로 당당히 설교했다(행2:14 이하).

베드로는 대제사장과 장로와 서기관 같은 이들이 자기를 잡아다가 죽인다 할지라도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이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며 돌아온 수가 삼천 명이나 됐다고 성경에 기록돼 있다.

그 후 헤롯왕이 베드로를 잡아 감옥에 가뒀다. 베드로는 쇠사슬에 매였으나 주의 사자가 감옥에 나타나서 쇠사슬을 벗겨 주었다. 이어 간수가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는데도 그 간수를 둘씩이나 지나치고, 쇠문이 저절로 열리는 이적을 체험하며 감옥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 후에도 베드로는 복음을 담대히 전하다가 순교했다. 두려워서 주님을 부인하던 그  옛날 베드로가 아니다. 죽을지라도 당당하게 예수를 전하는 담대한 사람으로 변했다. 죽을지라도 예수를 전하는 양심의 자유가 충만했기 때문이다. 양심의 자유는 이처럼 담대하게 한다.

우리도 주님께 양심의 자유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신앙 안에서 양심의 자유가 없는 사람은, 몸이 조금만 피곤해도, 날씨가 조금만 나빠도, 기분이 나빠도 “교회에 못 가겠다”고 드러눕는다. 피곤하다는 사실에 결박당하고, 날씨에 결박당하고, 기분 나쁜 일에 결박당하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결박당하는가.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에 그 어떤 것에도 결박당하지 말아야 한다. 죽을 때까지 자유해야 한다. 영적생활을 결박하는 자가 없는 상태가 바로 성령 충만이다. 성령 충만은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이다.

우리는 누구나 세 가지 점에 얽매인다. 첫째, 율법의 정죄, 둘째, 마귀의 참소, 셋째 하나님의 형벌. 하지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는 순간, 우리는 율법의 정죄에서 해방됐다. 마귀의 참소에서도 해방됐다. 또 하나님의 형벌에서도 해방됐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한 자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의 죄를 기억조차 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양심의 자유, 심정의 자유를 얻었다. 이 자유를 얻은 사람은 죽음도 두렵지 않다. 죽음이 두려운 사람은 아직도 죄에 결박당했기 때문이다. 죽은 다음에 죄를 어떻게 감당하랴 하고 아직도 정죄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에서 자유, 하나님의 형벌에서 자유하다면, 목숨이 끝나는 순간 영혼의 때에 맞이할 영광이 위대하다. 영생이 위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에도, 죽음에도 언제나 자유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 앞에서든, 언제 어디서든지 자유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몇 월 며칠 몇 시에 받았느냐고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피 흘리신 그날, 인류는 다 구원받았다. 그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을 내 몫으로 누리지 못한다. 2000년 전에 예수께서 피 흘려 죽으셔서 죄를 사해 주심으로 인류는 이미 다 구원받았다. 그러니 이 사실을 믿어서 구원을 내 몫으로 누리면 된다.

그런데 언제 구원받았느냐고 정확히 날짜와 시각을 대라고 하면, 정확히 모른다는 점에 결박당하게 된다. 앞으로 누가 구원을 언제 받았느냐고 물으면, “나는 예수를 믿을 때 구원받았다”라고 대답하라. 예수가 내 죄를 짊어지고 피 흘려 죽으신 사실을 믿는 순간, 구원을 자기 몫으로 확보했다. 그런데 구원받은 날짜를 대라니, 이는 말도 아닌 소리다. 그런 말에 현혹되지 마라.

우리는 언제 구원을 받았는지 정확한 날짜와 시각을 몰라도 분명히 예수가 나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내 죄를 사하시고 나를 양심의 결박에서 자유케 했다, 죄에서 자유케 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소유해야 한다.

예수가 2000년 전에 피 흘리셨으니 인류는 다 구원받았다. 내가 그 사실을 믿을 때 구원을 확보했다. 그것은 날짜와 시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말 만드는 사람들 때문에 양심이 결박당하면 안 된다. 우리는 참으로 자유해야 한다.  <계속>

*윤석전 목사 ‘무보수전도자학교’ 강의를 요약·정리한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34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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