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보수전도자학교(117)] 자신을 보는 말씀의 눈이 있어야 한다

등록날짜 [ 2014-09-23 23:10:52 ]

이번 호부터 성경을 보는 영적인 눈에 관하여 공부하고자 한다. 이 과정이 단순히 지식에 그쳐서는 안 되며, 자기 심령에 체험하여 성경을 아는 영의 눈이 활짝 열리기를 바란다. 그래서 나도 살고 죽어가는 수많은 영혼을 살려 예수 생명을 주는 전도자의 삶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영적 자원으로 삼기를 기대한다. 
 

 성경은 신령한 안경이다 

 

맑은 물속을 들여다보면, 물밑의 세계가 훤히 보인다. 실제로는 수심이 무척 깊은데도 육안으로는 야트막한 개울처럼 여겨질 정도로 가깝게 보인다. 물이 맑아 시야를 전혀 가리지 않아서 그렇다.

성경을 읽을 때도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죄의 안목으로 시야를 가리지 않고, 오직 영의 눈을 활짝 뜨고 읽으면 성경 66권에서 하나님의 세계인 영적 깊은 세계가 자세하게 다 들여다보인다.

이처럼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신령한 영적 세계가 환히 보이면 언제 어디서든지 성경을 통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유자재로 처세하고 전도도 할 수 있는 영적 자원을 얻게 된다.
 

설교자가 성경이라는 신령한 영의 안경을 쓰면 세 가지가 보인다. 첫째, 하나님의 섭리가 보인다. 죗값으로 지옥 갈 인간을 살리시려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절절하게 인류를 사랑하신 구원의 섭리가 보인다.

둘째, 말씀을 듣는 성도들의 심령이 보인다. 죄, 질병, 저주, 가난, 사망, 온갖 불가능한 문제에 얽매여 고통받는 자들이 당하는 불행이 어디에서 왔는지가 보인다. 셋째, 죄로 오는 영육 간의 모든 문제와 고통을 예수로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보인다. 그렇게 환히 보이니까 예수의 피 공로에 의지하여 죄 사함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갈망하는 성도로 만들어 낸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훤히 보이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이웃에게 전달하게 된다. 성경을 보고 아는 영의 눈이 열리면 설교할 때나 전도할 때 매우 자신 있고 능력 있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말씀을 전달한다. 언제나 현장에서 듣는 자들의 불가능한 문제를 해결해 주고, 질병을 치유해 주고, 저주와 고난을 행복과 축복으로 바뀌어 주어 영원한 생명을 얻는 풍성한 영적인 역사가 파도치듯 일어나게 한다.
 

신앙생활 할 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나를 돕고자 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영의 눈이 열리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시험에 들었다면, 십중팔구 어둠의 주관자 마귀에 의하여 이런 영의 눈이 닫혔기 때문이다. 목회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왜 교회가 나와 맞지 않느냐?”라며 불만불평 한다. 교회는 당연히 개개인의 생각과는 맞지 않을 수밖에 없다.

교회는 교회를 세우시고 오직 영혼 구원의 사역을 운영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뜻대로만 운영된다. 누가 어떻게 운영하시는지조차 모르는 무지한 생각으로 교회를 비판한다면 이는 육신의 생각에 가로막혀 영의 눈이 어두운 사람이다.
 

우리 인간이 가진 육신의 눈은 세상을 쫓는 캄캄한 정욕의 눈이다. 그래서 자기 육신의 생각으로 사망으로 가는지, 성령의 생각으로 생명으로 가는지 전혀 모른다.
 

이런 사람은 육신의 요구 때문에 영적 생활을 버리게 되므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구원의 하나님,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 천국을 주시는 전지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을 볼 수 없으므로, 결국은 마귀에게 속아 죄를 지어 그 죗값으로 고통받다가 최후에 지옥형벌을 면치 못할 처참한 자신의 영적 상태를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주님이 열어주시는 영의 눈을 가져야 자기도 살고 이웃도 살린다.

영의 눈이 안 열리면 시험 든다 

 

제자들의 눈으로 바라본 예수는 전능한 분이셨다.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요6:8-13), 물 위로 걸어가시고(마14:22-33), 죽은 자를 살리시고(요12:1-11), 귀신을 쫓아내시고(눅11:14),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시고(눅17:11-14), 앉은뱅이를 걸어가게 하시고(행3:1-10), 소경의 눈을 열어 똑똑히 보게 하시는 분(요9:1-12). 이처럼 전혀 불가능이 없는 분이었으므로 장차 로마를 파괴해 로마의 식민지인 이스라엘의 국권을 회복하여 예수가 세상을 지배하는 임금이 되시리라고 믿었다. 그러면 그때 예수의 좌우편에서 한자리씩 차지해야겠다는 것이 제자들이 예수를 바라보는 눈이었다(마10:35-45).
 

그러다가 예수께서 장로 서기관 제사장 바리새인들에게 신성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가야바 안뜰에서 신문받고 이리저리 끌려다니시다 빌라도의 뜰에서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형이 확정되는 순간, 크게 절망하고 다들 도망하기에 급급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을 온 인류가 죽어 지옥 가서 온갖 고통당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로 죽어 생명 없어 멸망하는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다. 제자들에게는 예수를 구세주로 보는 영적인 눈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왜 하느냐? 신앙생활 잘하는 성도의 최후 목표는 무엇이냐?’는 것을 아는 축복된 영의 눈이 열려야 한다. 생사를 선택할 수 있는 영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제자들과 같이 예수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무엇 때문에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직접 일러주셔도 알아듣지 못한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16:21~22).
 

예수께서 인류의 죗값을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대신 갚아주시고 지옥 형벌을 면케 하셔서 영원한 천국을 유업으로 주시려는 엄청난 계획을 말씀하시는데도 수제자라는 자가 “그리하지 마옵소서” 하고 가로막은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지 않으면 인류가 어떻게 죄사함받아 구원을 얻겠는가?

제자들의 눈에는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러 오신 예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직 그들의 정욕적인 눈에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로마 정권을 전복시키고 이스라엘 국권을 회복하여 장차 전 세계를 지배하며 통치할 왕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와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난 것은 그들에게 예수를 구세주로 보는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해 줘도 알아듣지 못하면 이렇게 된다. 마귀역사에 의해 시험 들어 오해 하는 자가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께서 인류 구원의 사역으로 역사하신 예수를 볼 줄 아는, 신령한 말씀이라고 하는 영적인 안경을 쓰지 않은 사람이다. 

한번 영의 눈을 떴다면 계속 봐야 한다 

 

인간을 사랑하여 살리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진실한 말씀을 모르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영생의 말씀을 주시려고 하는 심정을 몰라 불순종하는 죄를 짓는다. 아담이 그랬다. 하나님께서 계명 중에 제 사계명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20:8) 말씀하시고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도 팔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느10:31). 

 

그런데도 사람들은 육신의 요구대로 불순종하여 불순종한 죄로 안식을 빼앗긴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명렁하시는 말씀대로 순종한 자에게 이 땅과 천국에서 안식하는 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지 못하니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는 말씀은 너무 율법적이지 않느냐? 그것은 구약 사람들에게 한 말씀이 아니냐?”고 자의로 해석하면서 안식의 법의 말씀을 지키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구약의 계명의 말씀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고 신약만 하나님 말씀이란 말인가? 그러면 신약 말씀은 지키는가? 안 지키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평한다. 그러면 창세기 말씀부터 말라기 말씀까지는 내버리지 왜 신약과 구약을 합쳐서 성경이라고 말하는가? 

 

구약 율법에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니 구약시대나 신야시대나 지금이나 똑같이 살인하면 살인죄인 것이다. 구약 율법에 “간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니 간음하면 구약시대나 지금 신약의 은혜의 시대 때나 똑같은 간음죄인 것이다. “도적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니 도적질하면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마찬가지로 죄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하셨으니 안 지키면 구약시대도 죄요, 신약시대 지금도 죄인 것이다. 그런데 다른 구약의 율법의 말씀은 어기면 죄로 인정하면서 왜 신약 시대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 물건을 사고팔지 말라는 말씀은 안 지키려고 억지 신구약의 논리를 펴면서 발버둥 치는가? 이런 것이 바로 인간의 상황의 사정에 따라서 하나님 말씀을 변질시키는 어처구니없는 인본주의적 발상인 것이다. 

 

예수 믿는 성도가 성경에 말씀하신 하나님의 심정과, 하나님의 심정을 전하는 설교 말씀을 통해 성도가 안식의 복을 받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지 못하면, “왜 시대의 현실에 맞지 않는 말씀을 지키라고 하는가?”라며 불평불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의적 해석으로 무시하게 된다.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그러나 신구약 모든 말씀은 전부 다 전 인류의 영혼이 잘되고 복 받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인류가 안식 안에서 복받기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기까지 사랑하신 심정을 가슴 절이게 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나 들을 때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못 산 것은 ‘아, 내가 잘못했구나. 앞으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살아야겠구나 그래야 불순종의 죄를 이기고 회개하여 영원히 살겠구나 하고 깨달았다면 바로 자기의 잘못한 죄를 보는 눈이 열린 것이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의인가 죄인가 죽음인가 삶인가 확실하게 하는 눈이 활짝 열려 있어야 한다. 그 영의 눈으로 마귀 역사냐, 성령의 역사냐, 생명이냐, 사망이냐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밝히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천국까지 가야 한다.


<계속>
 

*윤석전 목사의 ‘무보수전도자학교’ 강의를 요약·정리한 것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40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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