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곤 목사의 평신도신학 <32>] 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나

등록날짜 [ 2011-10-04 11:38:35 ]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세 가지 견해에 대해

예수께서 내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사실은, 맨 처음 예수를 믿는 사람이 고백하는 핵심 신앙고백 중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죽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어떻게 무죄한 사람이 내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해서 받을 수가 있었는가? 왜 예수님은 죽어야만 했는가? 그의 죽음은 무엇을 이루어냈는가? 어떻게 이것이 성취될 수가 있었는가? 예수의 죽음과 삶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고, 또 부활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속죄(대속)에 관한 교리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을 자주 마주한다.

기독교인에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은 세계 역사의 중심에 놓여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을 어떻게 다루고자 하시는지 하나님의 섭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해방하셨고 하나님 자신과 우리를 화해하게 하셨다.

초기 교회 역사에서는 어떻게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사단을 물리쳤는지, 그래서 인류가 사단의 압제에서 어떻게 해방되었는지를 강조했다. 이러한 견해를 보통 ‘속죄에 대한 승리자 그리스도 견해(Christ Victor view as the atonement)’라고 부른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사단을 물리쳤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초기 중세시대 이후 이러한 속죄의 이해는 점차 중요성을 잃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 몇몇 복음주의자를 포함한 기독교인은 신약에서 이런 속죄의 견해를 묘사하고 있음을 다시금 강조한다.

11세기에 들어서 안셀름은 예수의 죽음이 인간의 죗값을 지불함으로써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만족(Satisfaction)’을 가져온 것이라는 견해를 주장했다. 이것을 ‘속죄의 만족 견해(Satisfaction of the atonement)’라고 말한다. 안셀름 시대에 이 용어를 사용할 때, ‘만족(Satisfaction)’은 주관적인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누군가가 잘못된 이후에 요구하는 배상(賠償)을 말하는 것이었다.

안셀름의 견해를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께 대적한 죄가 크기 때문에 그 죄에 대한 빚이 인간에게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기에 인간은 그 죗값으로 영원한 지옥에서 고통을 당해야 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직접 이 죗값을 지불하셔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하신 일이며 오직 하나님의 희생을 거절한 자는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안셀름의 만족 이론이 오늘날 어떤 이들에게는 분명히 이해할 만하지만, 11세기 복음주의자 중에 이 견해가 예수의 죽음에 관한 성경의 견해를 표현하는 적당한 방식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2세기에 아벨라르는, 예수의 삶과 죽음의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삶과 죽음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본을 보여준다는 점을 지적하며,  새로운 차원에서 속죄를 이해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완전한 사랑(특별히 다른 이를 위해 기꺼이 죽으심)은 우리가 따라야 할 본이다. 속죄에 대한 이런 견해를 ‘속죄의 주관적 견해(subjective view of the atonement)’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이 견해는 예수의 죽음이 우리에게 준 주관적인 충격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이 우리를 위한 본이라는 사실과 우리에게 하나님을 향한 순종적 사랑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모두 동의한다. 하지만 이 시대 복음주의자는 이 견해가 속죄의 최우선적 핵심을 나타낸다고 인정하지는 않는다.

16세기, 존 칼뱅과 마틴 루터는 위와는 다소 다른 속죄에 대한 견해를 주장했다. 그들은 예수께서 인간이 당연히 감당할 징벌을 견디셨다고 믿었다. 오직 이런 방식으로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이 견해는 안셀름의 견해와 비슷하지만, 예수께서 실제로 인간의 죄를 감당하셨고 인간이 감당해야 할 심판을 받으셨다는 점이 다르다. 이런 견해를 ‘속죄의 죄속론(The penal substitution of the atonement)’ 또는 ‘속죄의 대속론(The substitutionary view of atonement)’이라고 부르고, 대부분 복음주의가 지지한다. 최근 몇 년 동안 레온 모리스나 존 스토트 같은 신학자들이 강력하게 옹호하고 있다.

17세기,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는 예수는 문자 그대로 세상의 죄를 담당하지 않으셨고, 인간을 위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도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을 따르면, 예수는 사실 하나님의 분노를 단지 견뎌내셨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죄의 무거움을 가르치셨고 우리에게 거룩한 삶을 살게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를 ‘속죄의 도덕적 통치 견해(the moral government view of the atonement)’라고 부른다. 이 견해는 역사를 통해 수많은 가치 있는 지지자를 찾았고, 최근에는 고든 올슨(Godden Olsen)과 조지 오티스 주니어(George Otis Jr.) 같은 복음주의자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중 최근에 복음주의 신학자가 논쟁하는 세 가지 견해 즉, 승리자 그리스도론, 죄속론 그리고 도덕적 통치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260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