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용어 알파와 오메가·113]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등록날짜 [ 2022-07-08 06:31:43 ]

만약 누구든 악한 짓을 저질렀을 때 그 자리에서 당장에 벼락을 맞거나 큰 손해를 보는 등 죄의 처분이 즉각 이루어진다면 악인이 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의협심이 강한 분들은 “공의의 하나님이 더 강력하게 통치하셔서 인류를 죽지 않을 만큼만 바로 징벌하시면 세상은 훨씬 질서 있고 더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따를 것”이라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뜻이 선하시다고 해서 방법까지도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독재자 ‘빅 브라더’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이나 생살여탈권을 기반으로 통제하려는 분이 아니시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죄인이 백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전8:11~12). 구약시대조차도 이처럼 자비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하신(출34:6) 것이 하나님의 성품이요, 죄를 용납하실 수 없으시므로 품 안의 독생자를 내어 주실지언정 즉결 처분 같은 지배 관계는 원치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관계’라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아버지가 규율이나 규칙을 조금 어겼다고 즉시 매질하고, 질문이나 의견 피력은 일절 허용하지 않은 채 오직 복종하게만 만들면서 “이게 다 널 위한 거야, 안 따르면 너 나중에 타 죽어!”라고 한다면 이를 온전한 ‘관계’라 할 수 있을까. 


주님은 우리와 공포에 기반한 노예와 주인의 관계를 원치 않으셨다. 애초부터 노예 같은 것은 싫어하셔서 율법에도 노예와 노예의 자식까지 영원히 소유하지 못하도록 희년을 두어 속박에서 자유케 하셨다(레25:54). 참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깨닫기 원하신 것은 당신이 자기 피로 사실 만큼 사랑하셨고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사1:18)라고 말씀하시며 대화하자는 것이다. 


여기에서 히브리어 ‘יָכח(야카츠)’는 ‘옳고 그름을 함께 따져 보다’라는 말이다. 사실 이런 개념은 코란을 비롯해 그 어떤 종교의 경전에도 없는, 신과 한낱 죄인이 변론하자고 한다는 것 자체가 얼핏 보면 신성모독이다. 우리 따위가 무엇이관대. 그래서 성령의 사람인 다윗은 행악자를 불평할 시간에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103:10~11)라고 행악자인 자신의 구원을 감사했다. “모세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 친구와 이야기 함과 같았고”(출33:11),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창5:24) 같은 장면도 관계의 산물이다. 


결국 하나님의 가장 깊은 것을 통달한 이들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찬란한 신비와 저마다 사랑의 비밀들이다. 우리는 공포의 영에 지배받지 않고 아들의 영으로 살고(롬8:15), 그 사랑을 알기에 두려움의 형벌을 피할 수 있다(요일4:18).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기도와 말씀, 찬양과 예배 가운데 성령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오라! 나와 변론하자. 네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위 글은 교회신문 <75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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