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와 과학·45] 성경이 말하는 생명의 의미와 인간 존엄성(1)

등록날짜 [ 2018-07-12 12:30:00 ]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를 다른 형태로
변형·발전시키는 과정이 ‘만듦’이라면
‘창조’는 아무것도 없는 환경 가운데서
한 차원 높은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


생명이란 무엇인가. 또 인간의 생명은 왜 존엄한가. 먼저 생명에 관해 말해 보자. 이 문제로 과학자 아닌 이들과 토론한 적이 있다. 그때 생명은 살아 움직이는 것이다, 먹고 대사 활동을 한다, 꿈 혹은 목표 희망을 뜻한다 등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모두 일리 있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생명과학 분야에 몸담은 지 40년이 지났고, 대학에서 현재 학생들에게 생명과학 과목을 가르치는 이 시점에 이런 질문을 다시 받는다면 생명체는 다음과 같은 과학적 특징이 있다고 답했을 것이다. 이는 동물, 식물, 미생물에 모두 해당하는 사실이다.
첫째, 생명체는 세포로 구성된 조직이 있다.

둘째, 에너지를 사용해 물질대사를 한다.

셋째, 생체를 있는 그대로 유지하려는 항상성을 가지고 있다.

넷째, 외부 자극에 반응하고, 적응한다(어떤 교과서는 이를 진화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다섯째, 생식(生殖)을 한다. 이는 생명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자손을 증식하되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특징이다. DNA와 같은 유전 정보가 대대로 전달이 돼야 한다.

사실 위의 답들은 생명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현상일 뿐이다. 모든 생명체는 태어나고 성장하며 운명적으로 죽는다. 그렇다면 이 다양한 생명체는 어디에서 왔으며, 죽은 후 어디로 가는 것일까? 기독교인으로서 그 답은 생명체를 창조하신 생명의 원천인 하나님에게서 왔으며, 땅에 속한 생명의 속성은 땅으로 돌아가고 하늘에 속한 생명의 속성은 하늘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땅에 속한 생명의 속성으로는 ‘육체’ ‘혼’ 등을 말하고, 하늘에 속한 생명의 속성은 ‘영’을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생명은 언제 시작됐는가. 사람은 언제 영혼을 소유한 완전한 인간이 되는가? 물론 배 속의 태아와 태어난 아기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고, 사람마다 혹은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한 것도 사실이다.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인간의 영혼은 출산과 동시에 주어진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우리나라에서는 태아가 엄마 배 속에서 열 달 동안 자라다 나왔다고 하고, 서양에서는 이를 아홉 달이라고 한다. 물론 만 아홉 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1~2주까지 오차가 있겠지만, 과학적으로는 포궁에서 정자와 난자가 수정한 후 그 세포가 자라기 시작해 266일 정도 있다가 이 세상에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 민족은 아기가 태어난 지 100일째 되는 날을 기념하여 ‘백일잔치’를 베푸는 풍습이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나 생명과 관련 있는 두 가지만 생각해 보자.

▲ 출생 후 세 달가량 되면 면역체계가 완비돼 100일을 지난 아기는 생존 확률이 높아지기에 이를 축하한 것이다. ▲ 100일 잔치를 하는 날을 기준으로 대략 1년 전에 태아를 잉태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기에 이날을 진짜 생명이 잉태된 생일로 기념하는 것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임신 기간 266일에 100일을 더하면 거의 1년 되는 날짜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태아를 이미 생명으로 간주하고 이를 배 속에서부터 교육했고(이를 태교라고 한다), 그렇기에 태어나자마자 아기를 한 살로 여기는 것이다.


<사진설명> 우리 민족은 태아를 이미 생명으로 간주하고 이를 배 속에서부터 교육했고(이를 태교라고 한다), 그러기에 태어나자마자 아기를 한 살로 여긴다.

이번에는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에 관해 논의해 보자. 생명과학자의 눈으로 본 창세기 천지 창조 사역은 궁극적으로 생명 창조를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절정에는 물론 인간 창조가 있다. 또 창세기 1장과 2장에서는 창조라는 동사(動詞)가 매우 특별하게 사용되었다. 창세기 2장 3절에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라는 기록이 있다. 나는 이 구절을 깊이 묵상한 후에 이런 질문을 했다. ‘하나님은 무엇을 만드시고 무엇을 창조하셨는가?’ 위에서 언급한 창세기 2장 3절 말씀에 근거해 창세기 1장에는 ‘창조하다’와 ‘만들다’가 특히 구분돼 사용됐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창세기 2장 3절이 1장 창조 행위의 실질적인 마무리 문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유독 세 군데서만 ‘창조’라는 단어를 썼을까?

우리는 모두 학교에서 동사 ‘만들다’와 ‘창조하다’의 차이점을 배운 적이 있다. ‘만들다’는 ‘창조하다’를 포함하는 더 큰 의미의 단어이며, ‘창조하다’는 매우 구체적인 의미를 지닌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드셨지만, 구체적으로는 창조하신 것이다. 즉 창조는 무(無)에서 유(有)로 한 차원 더 높은 그 무엇의 만듦을 의미한다. 즉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creatio ex nihilo; creation out of nothing)이 ‘창조’이며, 이미 만들어진 것을 다른 것으로 변형시켜 만들거나 발전시키는 것이 ‘만듦’이다.

말하자면 목수는 나무로 탁자를 만들고, 예술가는 작품을 창조한다. 하나님은 천지와 인간을 만드셨지만 구체적으로는 창조 행위를 하신 것이다.


<계속>
(주) 이 내용의 일부는 ‘과학자의 눈으로 본 창세기’(두란노 간, 김준 저, 2016)에서 발췌함.


이병수 l  고려대 생명과학부 교수
한국미생물학회 회장


 

위 글은 교회신문 <58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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