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날짜 [ 2016-10-18 12:49:09 ]
-진행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담임)
-박성민 목사(한국대학생선교회 CCC 대표)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사진설명>성지 순례 중 터키 알팍 바돌로매 순교지에서 침신대 교수들과 함께한 윤석전 목사.
윤석전 목사: 예수께서는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요 선한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1:47~48). 그러자 나다나엘은 조금 전에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고 했던 말을 즉시 수정하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학계에서는 나다나엘을 ‘바돌로매’라고 합니다. 터키 국경 부근 시골 동네 알팍에 있는 바돌로매 유적지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살아 있는 기독교 역사박물관이라 부르는 터키. 그곳 카스피 해 서쪽 해안 부근 알바노폴리스에 있는 바돌로매 유적지를 향했다. 팔레스타인과 육지로 연결됐고 수리아 안디옥에서 1000㎞ 거리인 이곳은 복음이 빨리 전파될 수 있었던 천혜의 장소였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의 명령대로 바돌로매는 이곳에 왔다고 한다. 복음을 들을 만한 사람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찾아갔으리라.
윤석전 목사: 바돌로매가 순교했다는 장소 알팍은 터키 국경 부근 오지에 있습니다. 알팍을 자세히 소개해 주세요.
홍순화 원장: 알팍은 한국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자료나 문헌도 거의 없습니다. 다만 과거 알바노폴리스에서 바돌로매가 순교했다는 전승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바돌로매가 왜 그 멀고 험한 오지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다고 전해졌는지 지리적인 이유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알팍 지역은 교통에 불편을 주는 바다가 없어 팔레스틴이나 안디옥에서 육로로 쭉 연결됩니다. 안디옥 교회에서는 약 1000km 떨어져 있습니다. 상당히 먼 거리지만, 당시 복음의 열정이 뜨거웠던 사도에게는 멀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윤석전 목사: 바돌로매가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나다나엘과 동일 인물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무슨 근거로 두 사람을 동일 인물로 보는지요?
박성민 목사: 공관복음에는 바돌로매가 예수 제자 열둘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공관복음 전체를 보면, 바돌로매는 이름만 소개되었을 뿐입니다. 이와 달리 요한복음에는 바돌로매가 전혀 언급되지 않고 나다나엘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왜 두 사람을 같은 인물로 볼까 생각해 봤습니다.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에서 제자들을 정확히 다루고 있다면, 그들의 이름을 대조해 볼 때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보듯, 나다나엘을 예수께로 인도한 사람은 빌립입니다. 공관복음을 보면, 빌립 다음에는 늘 나다나엘이 등장합니다. 둘이 같이 움직인 듯, 이름이 항상 같이 나옵니다. 빌립과 바돌로매가 같이 다니고 빌립이 나다나엘을 인도했기에, 바돌로매와 나다나엘은 동일인일 가능성이 큽니다. ‘바돌로매’는 ‘톨매’ 또는 ‘탈매’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원래 이름은 ‘나다나엘’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윤석전 목사: 바돌로매는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됐는지 궁금합니다.
박성민 목사: 바돌로매가 나다나엘이라 가정하고 말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할 때, 그들의 대화를 살펴보면 둘이 어떤 사이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소개할 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분을 만났다”라고 말합니다. 이로 볼 때, 빌립과 나다나엘은 성경을 잘 알고 늘 묵상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의 대답 역시 그런 사실을 입증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미가서에는 메시야 탄생 예정지를 베들레헴이라고 했습니다(미5:2). 둘은 성경을 많이 알고, 서로 교류했기에 이런 대화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빌립은 더 말하지 않고 “와 보라”고 합니다. 나다나엘은 빌립을 신뢰했기에 좇아가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말씀하시자, 바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합니다. 바돌로매는 빌립 소개로 예수님을 만난 뒤 메시아임을 확인하고 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됐습니다.
윤석전 목사: 터키 군인이 바돌로매 순교지를 철통같이 지키고 일반인들은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요
홍순화 원장: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에 심각한 정치와 종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르메니아는 구소련 소속이었다가 1991년에 독립한 나라여서 정보를 거의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나라입니다. 예루살렘 올드시티 네 구역 중 하나가 아르메니아 구역입니다.
아르메니아는 이슬람권에서 유일하게 기독교 신앙을 지켜 왔습니다. 알팍 지역은 아르메니아 영토였는데 터키가 그 지역을 빼앗아 자국에 소속시켰습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인이 추앙하는 사도 바돌로매의 묘지가 알팍에 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계속 순례를 오니까요. 6·25 참전 우방국이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터키를 좋아하지만, 신앙 면에서는 기독교를 반대합니다. 또 국경이 가까이 있어서 철저하게 경비를 설 수밖에 없습니다.
아르메니아 영토를 터키에 복속시키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쟁은 바돌로매 순교지를 폐허로 만들었다. 곳곳에 난 총탄 자국은 치열했던 전쟁 역사를 선명히 드러낸다. 나다나엘과 동일 인물로 여겨지는 바돌로매. 예수님을 소개하던 빌립에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며 회의하던 그. 그러나 바돌로매는 메시아를 만났고 복음을 증거하다 순교했다. 그의 존재를 덮으려는 터키 정부에 의해 순교지는 철망 속에 갇혀 있다. 그만큼 바돌로매의 존재는 이슬람인들에게 두려운 도전이었다.
윤석전 목사: 사도 바돌로매의 특징을 성경을 근거로 말씀해 주세요.
박성민 목사: 요한복음 1장에 기록된 나다나엘과 연결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성경을 묵상하며 깊이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거짓이 없는 사람입니다.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1:47)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에서 그런 특징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구절은 요한복음이 구약과 얼마나 밀접한지 잘 보여 줍니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야곱’은 ‘간사하다’ ‘꾀가 있다’ ‘남을 속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창세기 27장을 보면, 에서가 동생 야곱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이름 그대로 나를 속였다”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32장에는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천사를 이겼을 때 “다시는 야곱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겠다”라고 천사가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구약 내용과 연결해서 나다나엘을 향해 “참 이스라엘 사람”, 그리고 야곱의 성격이 전혀 없다는 뜻인 “간사함이 없는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셋째, 바돌로매는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8). 무화과나무는 당시 기도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바돌로매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바돌로매의 특징이라고 하겠습니다.
윤석전 목사: 요한복음 1장 50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하신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박성민 목사: 요한복음은 구약을 알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다”고 하니까, 나다나엘이 예수님을 향해서 바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임금”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이어 말씀하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우리는 ‘위를 오르락내리락한다’는 말에 친숙합니다. 창세기 28장을 보면 야곱이 꿈꾼 내용이 나옵니다(창28:10~22). 그 꿈과 연결할 때 나다나엘에게 하신 말씀은 ‘인자 위에 머무르시고 인자를 통해서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것이다’라는 축복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다나엘은 처참한 죽음을 당했다고 합니다. 산 채로 칼로 가혹 행위를 당했기 때문에 나다나엘을 ‘세 개의 칼’ 또는 ‘무화과나무’로 상징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1장 50절 말씀은 순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순교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까지 하게 된다는, 예수님의 예언적인 축복의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사진설명>바돌로매의 순교 - 후세페 데 리베라 作 (1626~1627).
산 채로 껍질이 벗겨져 순교하는 바돌로매를 묘사했다.
윤석전 목사: 바돌로매가 어떻게 순교했는지 전승에 담긴 내용을 소개해 주세요.
홍순화 원장: 전승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 오다가 어느 집단에 의해 기록돼 지금까지 남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진위(眞僞)를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쨌건 아르메니아에 내려오는 전승을 보면, 아르메니아 지역에 와서 복음을 전한 사람은 유다 다대오와 바돌로매 두 사람입니다. 먼저 온 다대오는 주후 43~66년경까지 복음을 전했고, 그다음 바돌로매가 주후 60년경에 와서 사역했습니다. 바돌로매는 아라비아 쪽, 페르시아 남쪽, 심지어 인도에까지 가서 하나님의 큰 역사를 나타내다가 아르메니아에 왔다고 합니다. 바돌로매 순교 전승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고 고통당하다가 머리를 거꾸로 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눈물겨운 내용입니다.
윤석전 목사: 바돌로매가 그 모든 고통에도 굽히지 않고 순교했다는 아름다운 복음의 정신을 보면, 사소한 근심·걱정에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우리의 모습이 비춰집니다.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바돌로매를 보면서 복음을 위해 절대 변하지 않으리라 각오하게 됩니다.
윤석전 목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낼 때 둘씩 짝을 지어 보냈는데, 그 기준은 무엇인가요?
박성민 목사: 누가복음 10장 1절에 보면 주님께서 칠십 인을 세우시고, 당신이 가실 곳에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먼저 보내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또 구약 신명기 17장에는 재판에 증인을 세울 때 둘 혹은 세 사람을 채택하라고 했습니다(신17:6). 사실상 당시 유대 사람들이 어떤 근거를 제시할 때 최소한 두 사람을 세운 것입니다. 그런 구약 내용을 알고 제자들의 사역을 보면, 늘 둘이 함께 다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같이 다녔는데, 베드로는 제자 중에 가장 연장자였고 요한은 가장 어렸으니까 서로 보완해 주는 기능을 했으리라 여겨집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이 같이 다닌 것은 두 사람이 친했기에 더 좋은 짝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같이 다니면 외롭지 않고 서로 보호해 줄 수도 있으니 협동해 복음 전도 사역의 효과를 높였으리라고 봅니다.
윤석전 목사: 바돌로매 순교지는 삼엄하게 경비를 선다는데, 어떻게 순례할 수 있나요?
홍순화 원장: 알팍 지역까지 찾아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차피 안에는 들어갈 수 없거든요. 터키는 남한보다 7배가량 넓은데, 알팍은 터키 동쪽 맨 끝에 있습니다. 거리를 상상하면 엄청납니다. 육로로 간다면 꽤 여러 날 걸립니다. 보통 아라랏 산을 많이 순례하는데, 반 호수가 있는 반(Van) 시(市)까지 가서 아라랏 산을 보고, 조금 더 가면 알팍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아라랏 산과 연결하여 방문하면 의미도 있고 좋습니다.
윤석전 목사: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나의 구세주라고 고백했다면, 말로만이 아니라 바돌로매처럼 생애를 다 바쳐 복음 증거로 고백하고, 순교로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누구에게든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사람으로 보이고, 평생 주님의 생애를 전하는 믿음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와 영광과 찬양을 주님께 올립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99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