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비화 간증] 반공포로가 하나님의 목자가 되기까지(下)

등록날짜 [ 2024-11-14 22:41:25 ]

구한말부터 1974년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엑스플로 전도대회에 이르기까지 희귀 사진 700여 장으로 보는 ‘대한민국 근현대사 전시회’가 연세중앙교회 대성전 로비에서 열리고 있다. 대한역사문화원 김재동 목사(하늘교회 담임)가 기획하고 연세중앙교회가 주최한 전시회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과 그 날들’은 한국교회사 관점에서 본 대한민국 건국 과정을 사진 수백 장과 자세한 설명으로 생생하게 묘사한다.


지난 10월 16일(수) ‘대한민국 근현대사 사진전’과 관련해 6·25전쟁 당시 반공포로였던 김창식 목사가 연세중앙교회를 방문해 윤석전 담임목사와 대담을 나눴다. 올해 94세인 김창식 목사는 황해도 출신이며, 6.25 당시 전장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으나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목숨을 구해 반공포로 석방에 사용하셨다. 이날 대담에서 김창식 목사는 하나님께서 자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게 하시고 목회자가 되게 하기까지 경험한 간증을 실감 나게 전했다. 이 상세 내용을 지난 호에 이어 지면에 소개한다.


지난 호에서…황해도 출신인 김창식 목사는 1950년 6월 25일 주일, 북한이 남한을 기습 침공하자 인민군에 징집되었고, 이후 유엔군 전투기의 폭격에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가 포로로 잡히게 된다. 2년 동안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던 중 휴전협정 협의 과정에서 포로 전원이 북으로 강제 송환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어려서부터 신앙생활 하며 반공 의식을 품어 온 김창식 목사는 ‘포로 교환 결사 반대’라고 쓴 혈서를 띠로 만들어 반공포로들과 이마에 동이고 목소리 높여 외쳤다.


당시 포로수용소 군목이던 헤럴드 보켈(Harold Voelkel, 한국 이름 옥호열) 선교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포로 교환 결사 반대’ 띠를 거두어 프리스턴대학교 동문인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했고, 혈서를 보고 감동한 이승만 대통령은 포로 중에도 기독교인과 우익 세력이 많이 존재함을 알게 되어 반공포로 석방을 결정한다. 결국 자유의사에 따른 포로 교환 정책 덕분에 남한에 남겠다고 의사를 전한 김창식 목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게 되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로 부르심도 받는다.


<사진설명> 6·25전쟁 당시 인민군에 징집되었다가 반공포로가 된 김창식 목사가 연세중앙교회를 방문해 윤석전 담임목사와 대담을 나누고 있다.



자유 수호 위한 이승만 대통령의 노력

내가 포로수용소에 있었을 때 이승만 대통령이 휴전을 반대하며 “만의 하나 유엔군이 철수하면 국군 단독으로라도 북진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고 들었다. 당시 장기화한 6·25전쟁에 부담을 느낀 미국은 보장 없는 ‘휴전정책’을 강행하고 있었고, 중공군 100만을 북한에 그대로 주둔한 채 하는 휴전은 얼마 안 있어 제2의 6·25가 발발할, 말 그대로 ‘대한민국에 대한 사형집행’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후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길을 모색했고, 그것은 바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뿐이었다.


1953년 1월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들어섰고, 후보 시절 아이젠하워는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을 비난하며 “새 행정부의 첫 과제는 6·25의 조기 종식”이라며 전쟁에 지친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쳐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러나 당선된 아이젠하워 역시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 대해 이전 행정부와 차이를 보이지 않았고, 이승만 대통령의 끈질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요구에도 군사적 지원 정도만 약속했다.


그러자 이승만 대통령은 ‘미일안보조약’ 같은 수준의 한미안보조약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송환을 거부하는 북한 출신 반공포로를 석방할 것을 암시했고, 결국 2만 7000명에 달하는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대한 미국의 결단을 촉구하는 강력한 승부수였고, 나와 반공포로들로서는 북으로 송환될 위기에서 대한민국의 국민이 될 수 있는 감격스러운 기회였다.


결국 수년째 이어지던 전쟁에 부담을 느껴 휴전을 급히 추진하던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 덕분에 큰 압박을 느꼈고 아이젠하워 대통령 역시 국무회의에서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을 차지하도록 내버려둬서도 결코 안 된다”라고 강조하며 한국을 지키는 정책으로 선회했다. 결국 휴전협정이 맺어지기 보름 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할 것이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했고,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은 전쟁 후 잿더미가 된 대한민국이 안보 위험 없이 경제 발전에만 집중하며 반세기 만에 세계 정상 수준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북한에 예수 보혈의 능력 전하길 소망

나를 비롯하여 27명이 쓴 혈서로 말미암아 포로 4만여 명 가운데 3분의 2가 자유를 얻는 계기를 맞았고, 6·25전쟁 당시 흘린 수많은 군인의 피로 말미암아 대한민국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하물며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하나님께 드린 “예수 그리스도의 흠도 없고 점도 없는 보배로운 피”(벧전1:19)가 죄의 노예가 되어 있던 셀 수 없는 죄인(포로)을 해방시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석방이 된 후 옥호열 선교사에게 장학금을 받아 서울신학대학교를 졸업했고, 문래동성결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서대문성결교회와 답십리교회에서 목회를 하였다. 그리고 1972년 초 미국에 건너와서 선랜드한인교회를 개척했고 25년간 담임 목회를 하며 신학교 교수로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현재는 LA한미장로교회의 원로로서 신학교와 한인교포교회에서 설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을 계속 전하고 있다.


다시는 6·25전쟁과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고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지금의 젊은 세대는 전쟁의 참상을 모르는데, 한국교회가 통일을 소망하며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 북한에서 부흥과 교회가 가장 왕성했던 황해도가 그립다. 내가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하나님께서 통일시켜 주셔서 북한에 돌아가 복음 전할 날을 소망하며 기도한다. 지난 90년 인생 발자취를 돌이켜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에 감사한다. 할렐루야! 아멘!




<사진설명>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해방 은인인 이승만 대통령 초상화를 들고 수용소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사진설명> 대한민국 근현대사 전시회를 관람하는 김창식 목사. 반공포로 관련 전시물 앞에서 “6·25전쟁 당시 혈서를 쓰고 왼팔에 ‘결사반공’이라는 문신을 새기면서까지 자유를 호소했다”라고 고백했다.


김창식 목사 (LA한미장로교회 원로)

위 글은 교회신문 <87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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