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곤 목사 칼럼] 대속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등록날짜 [ 2026-02-12 20:58:28 ]

멸망할 인류의 죗값을 갚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 예수님

모진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며

하나님과 사이의 죄의 담 헐어 주셔


마가복음 강해(45)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118:22~23).


마가복음 14장은 시편의 말씀처럼 모든 사람에게 배신당하고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주받고 버림받은 그 자리가 곧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대속하신 자리였습니다. 이는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놀라운 반전이며 은혜의 역설입니다.


내가 바로 예수님을 부인한 자요, 내가 바로 예수님을 팔아넘긴 자요, 내가 바로 예수님을 배신한 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런 나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나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바라보며 어찌 회개가 나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도수장으로 끌려간 어린양

마가복음 15장은 예수께서 육신의 고통을 온전히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새벽이 되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서기관들, 곧 온 공회가 모여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재판을 마친 그들은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갔습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유대 공회는 사형 집행권이 없었으므로 총독 빌라도의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빌라도는 로마의 제5대 유대 총독으로, 주후 26년부터 약 10년 동안 유대 땅을 다스렸습니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로마에 반역한 죄로 거짓 고소를 했지만(눅23:2), 그 모든 고소 앞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변호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반역죄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대한 범죄였지만, 그럼에도 침묵하신 까닭은 아버지의 뜻을 아신 예수님께서 이미 고난의 잔을 마시기로 결단하셨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여러 차례 심문한 끝에 예수님께 죄가 없음을 알았기에(눅23:4), 그분을 놓아주려 했습니다. 마침 유월절 명절이 되어 총독이 죄수 한 명을 사면하는 관례가 있었는데, 그때 살인자이자 폭동의 주동자인 ‘바라바’가 함께 갇혀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백성에게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막15:9). 그는 죄가 없어 보이는 예수님이 풀려날 것을 예상했지만, 백성은 오히려 살인자 바라바를 놓아주고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결국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예수님을 채찍질한 뒤 십자가형에 넘겨주었습니다(막15:15). 자신의 정치적 유익을 위해 죄 없는 이를 희생시키는 이 장면은, 진리가 가려지고 다수의 목소리가 정의로 둔갑하는 세상의 불의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불의한 세상 한가운데에 진리로 오셔서 진리가 없는 죄악된 세상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이때 빌라도가 명령한 ‘채찍질’은 단순한 형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로마 군병들이 사용하던 채찍은 여러 가닥의 가죽끈 끝에 납덩이와 동물의 뼈 그리고 쇠 조각 등을 달아 살을 찢어 버리는 도구였습니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살점이 뜯겨 나가고, 근육과 뼈가 드러날 정도로 잔혹했습니다. 많은 이가 이 채찍질만으로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몇 걸음도 가지 못하고 쓰러지실 만큼 피를 흘리신 것도, 바로 이 채찍질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잔혹한 형벌을 묵묵히 견디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죗값을 대신 담당하기 위한 속죄의 고통이었으며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라는 말씀이 성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또 십자가형은 로마 제국이 반역자나 흉악범에게만 내리던 가장 잔혹하고 수치스러운 사형이었습니다. 죄수는 옷이 벗겨진 채 공개적으로 조롱을 당하며,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수치 속에 놓이게 됩니다. 이어 손목과 발목에 굵은 못이 박히는데, 팔과 다리의 신경을 관통하는 못은 극심한 통증을 유발했고, 온몸의 무게가 못 박힌 팔에 실리면서 숨 쉬는 것조차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십자가형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출혈과 피로, 탈수와 질식, 심장 기능 저하가 겹치며 서서히 죽어 가게 만드는 처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끔찍한 고통을 한마디 원망도 없이 감당하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의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로마 병사가 몰약을 탄 포도주를 드렸을 때도 이를 받지 않으시고 고통을 온전히 감당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죄를 짊어진 고난을 예수님 홀로 끝까지 담당하시려는 사랑의 결단이었습니다.


<사진설명>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한 장면.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 구원을 위한 대속물로서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기까지 우리의 죄를 짊어진 고난을 끝까지 감당하셨다.


속죄의 피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

오전 9시(제3시)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정오(제6시)가 되자 온 땅에 어둠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3시(제9시)에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습니다. 이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을 원망하는 외침처럼 들리지만, 이는 시편 22편 1절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극심한 고난에도 하나님의 구원을 신뢰하며 부르짖은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끝까지 이루실 것을 믿음으로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말씀을 남기시고 운명하시자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막15:38).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이 휘장의 두께는 약 15cm에 이를 만큼 매우 두꺼웠고, 황소 두 마리가 양쪽에서 잡아당겨도 찢어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했다고 합니다. 이 휘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의 담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0:19~20).


과거 성소에서 지성소에 들어가는 일은 죽을지 살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오직 대제사장만 두려운 마음으로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님의 속죄의 피를 힘입어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모든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죄의 담은 허물어졌고, 우리도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시기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면서까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회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93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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