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읽는 시편 (11) - 시편 4편 ①]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밤

등록날짜 [ 2026-09-22 13:27:50 ]

요단강 나루터. 모닥불이 사그라진다. 병사들은 진흙 바닥에 쓰러져 잠들었다. 한 사람만 눕지 못한다. 어제까지 왕이었던 사람이다.


다윗. 골리앗을 돌팔매로 쓰러뜨린 소년, 이스라엘을 반석 위에 올린 임금. 그 왕좌를 노린 자가 하필 아들이었다. 압살롬. 준수한 얼굴로 백성의 마음을 훔친 왕자는 아버지를 향해 칼을 들었다. 왕은 싸우는 대신 도성을 비웠다. 맨발로 울면서 감람산을 넘었다.


그 길에 시므이가 나타났다. 돌을 던지면서 저주를 퍼부었다.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삼하16:8). 판결이었다. 몰락을 유죄의 증거로 읽은 판결. 


장군 아비새가 칼을 뽑았다. 저 죽은 개의 머리를 베게 해 달라고. 다윗이 막았다.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16:11). 한마디를 덧붙였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삼하16:12). 시므이는 판결했고 아비새는 집행하려 했다. 그러나 다윗은 판단을 넘겼다. 자기 몰락조차 자기 입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감찰하실 분이 따로 있었다.


저주는 길가에서만 오지 않았다. 함께 도망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말이 새어 나왔다.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시3:2). 모두가 판사석에 앉아 있었다.


그 판사석은 오늘도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다. 누가 큰 병을 얻었다는 소식이 돌면, 사업이 무너졌다는 말이 전해지면, 자식이 엇나갔다는 소문이 나면 위로는 늦고 해석만 빠르다. 뭔가 있었겠지. 하나님이 뭔가 보여 주시는 거겠지. 


당사자의 귀에는 그 말이 칼보다 깊이 들어온다. 억울해도 반박할 데가 없다. 소문은 재판을 열어 주지 않는다.


시므이가 틀렸는가. 다윗은 결백했는가. 아니다. 그의 과거에는 지울 수 없는 얼룩이 있었다. 충직한 부하 우리아의 아내를 취했고, 죄를 덮으려고 그 남편을 전장 맨 앞줄에 세워 죽게 했다. 중죄인이었다. 결백을 주장할 길은 애초에 없었다. 그에게 있는 건 하나였다. 선지자가 질책했을 때 변명하지 않고 엎드려 울었다는 것. 용서한다는 선고를 들었다는 것.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32:5).


밤은 처음이 아니었다. 사울에게 쫓겨 동굴에 숨던 시절, 죽음이 코앞까지 왔던 밤들. 그때마다 건져 낸 손이 있었다.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시4:1). 판결문을 믿는 근거는 문서 하나가 아니었다. 살아온 밤들이 증거였다.


다윗이 광야의 밤에 부른 이름이 이것이다. “내 의의 하나님이여”(시4:1). 내가 의롭다는 말이 아니다.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라는 말이다. 자기 결백을 믿는 자의 호칭이 아니라, 판결문을 쥔 자의 호칭이다.


그 판결의 근거를 물어야 한다. 죄인을 의롭다 선고하는 법정. 지상 어디에도 없는 법정이다. 근거는 피고의 무죄가 아니었다. 다른 이가 유죄를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 죄 없는 그가 피고석에 대신 섰다. 채찍을 맞았고, 못에 박혔고, 저주를 받았다. 죄 없는 이가 유죄가 되고 죄인인 내가 무죄가 되는 교환. 십자가에서 흘린 그 피가 판결문에 찍힌 인장이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롬8:33~34). 판결만 끝난 게 아니다. 변호인이 아직 법정에 서 있다. 지금도 나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이가 그이다.


‘시므이들’은 오늘도 말한다. 세상 법정은 여전히 시끄럽다. 소문은 재심을 요구하고 시선은 증거를 수집한다. 상급심은 이미 끝났다. 그 판결은 뒤집히지 않는다. 다윗은 그 밤에 결국 누웠다. 해명하지 못한 채로. 소문을 끄지 못한 채로. 판결문 하나를 품고서. 억울한 밤이 온다. 항소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만 눕는다.



위 글은 교회신문 <96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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