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신령한 기회

등록날짜 [ 2004-01-14 13:27:29 ]

누가복음 13:6∼9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세월 속에 인간을 두신 하나님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지으신 창조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모든 것들을 세월 속에 두시고 우리 인간도 세월 속에 두셨습니다. 그 세월 속에 기한을 두시고 우리가 마지막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세월 속에 있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를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는 실망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가꾸시는 은혜로 살고, 하나님이 지으신 은혜로 살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말씀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인간에게 어떻게 해야 행복한지를 깨닫게 하시는 지혜와 또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지식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인간의 어떤 고통도 어떤 문제도 어떤 불가능도 당장에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천지 만물을 다 주시고 아들도 주시고, 영생도 주시고, 그의 은혜 안에 모든 것을 누리며 살도록 우리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탕자의 기회
본문의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열매를 원하는 주인의 심정을 알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너무나 미련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사랑을 떠나 그저 아버지의 권면의 말씀과 사랑을 간섭과 시비로만 알아 불만이 많았습니다.

탕자는 아버지를 떠나 혹독한 고생을 한 끝에 아버지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다시 돌아옵니다. 만약 탕자가 아버지의 소중함을 발견하지 못하고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머나먼 타국에서 객사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해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영혼은 멸망하고 맙니다.

탕자가 고통 속에서 자기의 잘못을 깨달은 것은 자기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우리 인간도 공부해서 돈 벌고, 명예도 얻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움켜쥐고는 이만하면 행복하다고 대단히 우세할지라도 그가 죽을 병에 걸리거나 늙어서 죽게 될 때는 이것이 행복이 아니구나라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아도 어디에 가서 이 마지막 불행을 해결해야 하는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해서 멸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는 불가능을 가진 자의 기회
사랑하는 성도여, 우리는 최후의 불행 속에서도 탕자와 같이 우리의 불행을 해결하여 주실 아버지 집이 있으니 우리는 그 아버지 집으로 자기 불행을 가지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천국은 바로 우리가 가야할 마지막 기회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 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최후의 기회를 영생으로 가지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애가 터지도록 사랑의 말씀을 주신 것은 인간에게 멸망하지 말라, 저주받지 말라, 네 불가능에 얽매여 좌절하지 말라고 하시며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사랑하셔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는 고통당하는 자의 기회이며, 멸망 받는 자의 기회이며, 불가능을 가지고 좌절하는 자의 기회니 바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최고의 기회를 주시고자 우리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는 바로 나의 최고의 기회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믿음의 사람들로 그의 은혜 안에서 인간이 가진 수많은 불가능을 예수로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농부가 봄을 놓치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절대로 봄을 놓친 농부는 가을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도 농부의 봄과 같이 듣는 그 시간에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신령한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여러분의 심령의 옥토에 떨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거두어 사용할 수 있는 당신의 기회가 되어야 합니다.

노아의 기회
노아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는 자기의 전 재산을 다 들여서 방주를 짓는 기술자와 수많은 일꾼들을 써 가면서 하나님께서 지으라는 식양 그대로 방주를 지었습니다. 식양대로 지었다는 것이 곧 말씀대로 지었다는 것이요 말씀대로 지었다는 것이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식양대로 사는 것, 최후에 우리가 살 방주임을 알아야 합니다. 노아가 방주를 다 지은 후에 사람들에게 홍수가 날 것을 예언하고 방주에 타라고 아무리 애절하게 전해주어도 사람들은 도무지 방주에 타야할 만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홍수가 나서 죽을 만큼 천재지변을 만나본 사실도 없고 현재 홍수가 날 만큼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누가 그 방주를 인정하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은 사람의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순종하며 그것이 바로 신령한 기회입니다.

방주의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노아의 가족을 사람들은 손가락질하며 미련하게 여겼습니다. 신앙생활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을 세상은 이렇게 미련하게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그 순종 자체가 자기를 보호하는 방주임을 알아야 합니다.

홍수가 나자 노아의 여덟 식구만 살았습니다. 마지막 때는 노아의 홍수 때와 같다고 했으니 우리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기회
아브라함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12:1). 아브라함이 살던 갈대아 우르라는 동네는 우상의 도시, 저주의 도시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데라는 우상을 깎아서 팔아 먹고 사는 우상장수였으며 아브라함의 모든 생활기반은 그 곳에 닦여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목소리가 언제 들리든지 내게 들려오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내가 죄에서 저주에서 떠날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즉시 하나님의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갈 때 신령한 기회는 바로 우리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자신과 자기 후손에게 복을 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아브라함은 주저하지 않고 독자를 데리고 모리아 산에 올랐습니다. 장작더미를 쌓아놓고 그 위에 아들을 묶어 올려놓은 후, 목을 쳐서 번제로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칼을 빼들었습니다. 그 순종하는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즉시 칼을 멈추라 명령하시고 수풀에 걸린 수양을 잡아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독자라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삼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는 사역의 시작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명령을 하시든지 그 말씀이 들리는 순간에 우리는 그것이 축복받을 기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는 불합리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성령이 감동하시는 순간에 절대 복종함으로 그것을 축복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신령한 기회를 놓친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축복하시고자 하는 섭리는 그냥 유산되고 맙니다.



야곱의 기회
야곱도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태중에 있을 때부터 자기가 장자가 되고 싶어서 형 에서와 뱃속에서부터 다투었지만 에서가 먼저 태어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물려받는 축복이 장자에게만 내려오는 축복이었기 때문에 그 복을 받기위해 뱃속에서부터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것입니다. 결국 야곱은 차자가 되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둘째가 큰 자요, 큰 자가 적은 자를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임종 직전에 축복을 빌어주기 위해 큰 아들 에서를 불러 별미를 해오라고 말합니다. 에서가 그 축복을 받기 위해 들판으로 뛰어나간 사이에 야곱이 별미를 준비하여 에서인 척하고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축복을 가로채 달아나고 맙니다. 야곱은 에서에 비해서 남자답지 못한 것을 성경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서가 들판을 뛰며 사냥하는 사이 야곱은 집에서 팥죽이나 끓이고 엄마의 치맛자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약한 사내였습니다. 그러나 사모하는 자에게 기회가 오고, 하나님이 주시려는 자에게 기회는 가게 돼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축복은 자기에게 기회가 올 때 빼앗기지 말고, 내 것으로 삼아야 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미 에서는 장자라고 하는 축복의 기회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냥을 하고 돌아온 에서는 장자의 직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 먹을 만큼이나 소홀히 여겼던 것입니다. 물론 장자의 직분을 그렇게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했겠지만 우리는 말로라도 축복의 기회를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삶 속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기회를 절대로 가볍게 여기지 말며, 빼앗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의 기회
누가복음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마리아에게 아들을 낳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이미 요셉과 정혼한 사이이기 때문에 아무리 생각해도 요셉의 자식 외에 다른 자식을 낳을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자기에게 주어진 단 한번의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1:35).

지구상에 여자로 태어나서 하나님의 아들을 자기의 몸을 빌어 낳는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지구상에 단 한번밖에 없는 이 일에 마리아가 선택되었다고 할 때 이것은 엄청난 기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신령한 기회에는 위기가 따릅니다. 유대인의 법상 정혼한 여자가 그 남편의 아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고 하는 것은 돌에 맞아 죽거나 불에 타 죽어야 할 법적 처벌을 당할 위기 상황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파혼과 함께 가문의 망신을 당하여 최악의 경우 죽음이 올지라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고 기회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를 보면 언제나 지금 나의 상황이나 형편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을 그 때에, 도무지 나로서는 할 수 없는 그 때에 주님은 나에게 강력하게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그 때 ‘내 사정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하고 하나님의 요구를 뿌리친다면 당신은 신령한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주님이 책임지실 줄로 믿고 순종하며 자기에게 주신 축복의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기회를 포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오셔서 절대 능력으로 무제한의 이적을 나타내셨습니다. 자기를 통하여 기회를 얻고자 하는 자에게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어나서 걷게 하시고, 벙어리가 말하게 하시고, 소경이 보게 하시며, 귀머거리가 듣게 하시고, 절름발이가 걷게 하시는 수많은 이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적은 언제라도 예수께 와서 예수를 자기의 기회로 삼는 자만이 이런 이적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기회는 아무나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혈루증에 걸린 여인의 기회
마가복음 5장을 보면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가 가는 길에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여 가실 때에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무리 가운데 섞여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자 혈루의 근원이 마르고 본인도 병이 나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여인은 예수로 인해 병을 고치는 기회를 얻었던 것입니다. 아무나 옷자락을 만졌다고 해서 자기의 불가능을 해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에워싸고 그의 옷을 만졌지만 이 여인만이 예수로 기회를 삼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예배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아무에게나 기회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이루어지게 하여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기회
마가복음 7장 24절 이하에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귀신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를 찾았지만 예수께서는 그에게 냉담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여인은 자기의 모든 자존심을 다 버리고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을 수 있나이다” 하면서 자기의 믿음을 보이자 예수께서는 그의 믿음을 인정하시고 그의 불가능의 문제를 즉시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끝까지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축복의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서로의 관계 속에서 자존심 때문에, 혹은 속이 상해서, 불만불평이 생겨서 기회를 포기하지 말고 그럴수록 승리하는 것이 기회며, 그럴수록 주님을 일하시게 하는 것이 바로 기회인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은 기회를 가지려고 하는 자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무에게나 기회를 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불가능을 주님이 해결하실 수 있다고 믿으십시오. 예수를 당신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기회를 찾는 자에게 기회를 주시려고 여러분 안에 와 계십니다. 그분을 일하시게 하는 축복된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든지 영육간의 불가능에 얽매여 고통당하는 자들에게 기회가 되어 주시려고 기다리십니다. 병든 자, 또는 죄에 얽매인 자, 수많은 염려와 근심을 가진 자가 있습니까! 이 시간 예수로 해결하기를 원합니다.

예수로 기회를 포착하라
본문의 무화과나무는 이제 기회가 한 번밖에 없습니다. 다음해에 열매가 열리지 않으면 찍혀버리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신령한 기회는 육신이 있을 때뿐입니다. 육신이 끝나는 순간 예수 믿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충성해서 면류관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전도해서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는 모두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를 믿지 않고 지옥 간 사람이 지옥에 가서도 예수 믿고 천국 갈 기회가 있다면 누구나 다 죽어본 다음에 예수 믿고 구원받지 않겠습니까? 육신이 끝나면 모든 기회는 다 상실되고 마는 것입니다. 육신이 이 땅에 있을 때만이 기회입니다. 그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영원히 멸망받을 자에게 영원히 영생하는 기회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는 자기로 기회를 삼으려고 하는 자를 절대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당하신 것은 인류에게 기회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허물이 있는 자에게 허물에서 자유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며,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죄악이 있는 자에게 죄악에서 자유할 수 있는 신령한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며,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자에게 평화의 기회를 주시고, 병든 자에게 건강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예수는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 치료받을 수 있는 기회, 축복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예수께서 자기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자기가 모든 기회가 되어주겠다는 것입니다. 기회를 구하는 자에게 실망시키지 않고 기회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로 모든 기회를 만들고, 모든 것을 얻는, 기회를 포착할 줄 아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5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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