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사 사진전 은혜 나눔] 하나님의 사람 건국대통령 이승만
복상균(54남전도회)

등록날짜 [ 2025-01-04 14:01:10 ]

대한역사문화원 김재동 목사(하늘교회 담임)가 기획하고 지난달까지 연세중앙교회가 주최한 근현대사 사진전 ‘하나님이 쓰신 사람들과 그 날들’은 한국교회사 관점에서 본 대한민국 건국 과정을 사진 수백 장과 자세한 설명으로 생생하게 묘사했다. 연세중앙교회는 연세가족을 대상으로 지난 10월 29일(주일)까지 사진전 리포트(소감문)를 제출하도록 했고, 지난 12월 8일(주일) 4부예배에서 부서별 수상자에게 상장과 상금을 수여했다. 장년부 수상자의 리포트를 소개해 연세가족들과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 복상균(54남전도회)

전 세계 국가에서는 대부분 자국의 초대 대통령을 국부(國父)라고 여기며 많은 존경을 표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유독 초대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실과 다른 협잡을 부리며 그가 존경할 만한 국부가 아니라는 주입식 교육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열린 ‘대한민국 근현대사 사진전’은 대한민국이 하나님의 은혜로 세워진 국가임을 알려 주고, 하나님의 사람 이승만에 대해 바로잡아 주어 오늘날 우리에게 바른 역사적 사관을 갖게 한다.

일제 강점기를 이긴 신앙의 힘
100여 년 전 조선은 우상숭배가 판을 치던 흑암의 땅이자 불평등한 신분제 탓에 백성 대부분이 노비의 삶을 살았다. 이처럼 영적으로 어두운 조선 백성에게 자유와 구원의 복음을 전해 준 존재가 바로 선교사들이다. 그 당시 복음 전도를 목적으로 배재학당과 같은 학교를 세워 자유를 선포하고, 세브란스병원, 보구여관, 특수학교(로제타 홀) 등을 세워 질병의 멍에에 갇힌 이들을 치료해 주고 불치병 같던 결핵에서 조선을 구한 것도 선교사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선교사들을 통해 세운 믿음의 터 위에 하나님의 사람 이승만이 태어났다. 1895년 청년 이승만은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선교사들에게 영어와 성경을 배웠고, 1899년 왕권 국가가 아닌 공화국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한성감옥에 투옥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한성감옥은 옥중학당이 되고 수많은 민족 지도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역지가 된다. 이때 한성감옥에서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예배드린 이들이 훗날 구국의 지도자가 되어 대한민국 건국을 위해 함께 싸우게 된다.

출소 후 이승만은 조정의 밀사가 되어 미국으로 가게 된다. 1905년 8월 4일, 대한제국의 국권 수호를 위해 루스벨트 미 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석 달 후 덕수궁 중명전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만다. 이때 대한 독립의 가능성이 외교에 있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미국에서 공부하기로 결심하며 언더우드, 에비슨, 헐버트 선교사 등과 미국 순회 집회(1908년)에서 한민족의 상황을 알리지만, 1910년 8월 29일에 그만 한일병합이 강제적으로 이뤄져 대한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승만은 기독교로 백성을 깨우치기로 결심하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 점차 기독교가 왕성해지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어나자 일본은 본격적으로 한국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한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본격적인 민족말살정책을 펼치며 신사참배(우상숭배)를 강요한다. 이를 거부한 믿음의 사람들은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 등이었고 한국교회 교단 중 유일하게 침례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한다. 일제의 총칼에 죽더라도 예수 믿는 순교 정신과 신실한 믿음을 앞세운 기독교인은 천왕이라는 우상을 신처럼 섬기는 일본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였을 것이다.

그 당시 이승만은 한미협회를 만들고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한다. 또 그의 저서 『Japan inside out』에서 일본의 실체를 밝혀 앞으로 일본이 미국을 침공할 것을 예언한다. 실제로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해 태평양전쟁이 시작된다. 이로 말미암아 이승만의 미국 내 입지가 강해지고 미국이 일제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기독교인들이 반발하여 민족말살정책이 생각만큼 진행되지 않자 일제는 한국교회를 말살할 음모를 계획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부흥하고 마음껏 신앙생활 할 수 있는 것은 일사각오의 믿음으로 죽기까지 복음을 지킨 믿음의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건국까지 험난한 영적 전쟁
광복의 기쁨 너머에는 대한민국 건국의 걸림돌인 공산주의와 좌우합작 같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특히 박헌영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는 등 공산주의 국가를 만드는 일에 앞장선 것과 반대로 이승만은 새 국가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되어야 한다며 민족 지도자들을 설득하였다. 이승만은 신탁통치와 좌우합작 등을 결사반대하고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조직해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에 호소해야 한다”라는 정읍선언을 통해 남한을 하나로 모으기 시작한다.

그 당시 좌우합작은 대한민국 건국 과정 최대의 위기였다.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이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합쳐 남한도 북한처럼 공산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에 한국교회를 대표하던 한경직 목사는 “기독교인이여,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정치를 바로잡으라”라고 당부하였고, 이승만의 외교를 위해 각 교회들이 후원하는 등 공산주의와 자유진영(기독교)의 싸움은 치열하였다. 공산주의 국가가 되는 순간 예수 믿는 복음은 사라지고 핍박이 찾아올 것이 너무나 명확했기에 예수 믿는 참 신앙인들의 치열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독트린으로 공산주의 확장 저지가 선언되었고 남북 총선거 실시(UN, 찬성43 기권9 반대6)가 승인되었다. 1948년 5월 10일 모든 국민에게 동등한 자유와 권리를 선물한 남한 자유총선거를 통해 남녀 모두 동등한 한 표로 국회가 구성되고 헌법이 제정되고 대통령이 선출되었다. 건국부터 남녀평등을 실현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이승만을 임시의장으로 하여 건국 국회가 열렸고(1948년 5월 31일) 건국 국회는 하나님께 선진한국, 통일한국, 선교한국을 허락해 달라는 기도로 시작되었다.

이후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대한민국은 기독교 사상을 기반 삼아 국가 운영을 시작했다. 대한민국 초대 내각은 독립운동가들로 구성된 반면 북한의 초기내각은 100% 친일파로 구성되었다. 그런데도 이승만 대통령의 초대 내각에 친일파 프레임을 씌우려는 의도가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바른 역사적 사실을 알고 대한민국 국부를 오해하는 이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구국기도회
대한민국 건국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철수를 결사반대하며 미군의 주둔을 주장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미군이 철수하면 중국과 소련의 공산당이 남한에 쳐들어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치슨 라인이 발표되어 미국이 대한민국을 방위하지 않는다고 해석되자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기습남침을 가해 6·25전쟁을 일으킨다. 지금도 주한미군의 철수를 주장하는 사람이 많지만, 70여 년 전 중국과 소련이 북한의 남침을 지원한 것처럼 오늘날의 상황도 바뀐 것은 없다. 다만 우리의 안보의식이 나태해졌을 뿐이다.

당시 트루먼 미 대통령은 미국의 참전을 빠르게 결정하였고 이러한 배경에는 미국의 목사님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으로 빌리 그래함 목사는 유년 시절을 평양에서 보낸 아내를 통해 한반도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고 평양 대부흥과 같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알게 되어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이 사실을 미국 전역에 알렸다. 결국 UN안전보장이사회는 참전을 결정하고 대한민국의 자유를 수호하고자 16국에서 군인을 보냈다. 수많은 예수 믿는 사람의 기도와 행함으로 대한민국의 공산화가 저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6·25 전쟁 중에 이승만 대통령도 기도를 쉬지 않았고 위기마다 기도 응답으로 대한민국이 무너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최초의 구국기도회는 1950년 8월 16일 아침, 영남지역 목사님들을 긴급 소집한 기도였고, 그다음 달에 이어진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열쇠도 기도였다.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도 중에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했고, 1950년 9월 29일 서울 환도식에서 맥아더의 인도 아래 주기도문으로 서울 환도식을 마쳤다.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고 오늘날에도 대한민국을 지키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역사를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부정할 수 없게 된다.

서울을 수복한 기쁨도 잠시 중공군이 개입해 전쟁의 판세가 바뀐다.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하는 일에 미국의 많은 군인이 전사하게 된다. 연합군 사망자 5만 7,615명 중 5만 4,246명이 미군 사망자이며, 미군뿐만 아니라 우리를 지켜 준 모든 국가와 군인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기도의 사람 이승만
전쟁이 장기화하자 강대국들에 의한 휴전협상이 시작된다. 휴전협상 동안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의 기도 골방인 경복궁 경회루에서 매일 2시간씩 기도했다. 그 기도 응답이었을까. 적대적이던 로버트슨 미 국무 차관보가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전시장이 되도록 돕겠다”라며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정전협정 후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인식을 미국 워싱턴D.C.에서 맺게 된다. 한민족 역사상 가장 안전하게 한반도를 지킬 조약이 체결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선진한국의 기초를 놓은 대통령이며, 농지개혁으로 농민이 농지를 소유하도록 하고 교육개혁으로 문맹률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학교 수와 학생 수도 대폭 늘렸다. 중화학공업의 토대를 마련하고 경제개발 3개년 계획으로 경제발전의 기초를 다진 후 박정희 대통령이 이를 이어받아 철강산업의 신화 포항제철소와 새마을운동 같은 사업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기독교인으로서 국가의식 기독교화, 군종제도·군목제도·형목제도 도입, 기독교 신문과 방송사 설립, 성탄절 공휴일 지정 등을 이루었다.

그런데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많은 오해와 루머가 있다. 그러나 논란 중 하나인 6.25전쟁 당시 한강교 폭파의 진실은 북한군의 진로를 막는 당연한 조치였으며 교각 폭파 당시 희생자는 종로경찰서 경찰관 외 소수의 민간인으로 추정된다. 또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비난하지만 이 대통령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도 물러나야 된다”라며 대통령직을 내려놓았고  서거 후에도 국민의 사랑과 지지를 받았다. 그는 대한민국을 사랑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사진과 증인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으며 이것이 팩트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우연이 아니라, 목적이 있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다. 대한민국 건국은 자랑스럽게 여기고 지켜야 할 역사이다. 오늘날 국가 분단 상태에서 특정 세력이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계속 왜곡하고 있다면 그들의 목적은 대한민국의 주적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업적도 지우거나 흠을 내려고 하나, 사실 그대로를 알려 주어 국부의 명예를 지키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려 주어야 한다.

이승만 대통령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과 기도하는 사람이 어떻게 쓰임 받는지를 배울 수 있다. 한성감옥의 낮은 곳부터 미국 중심부에서의 시가행진까지 언제나 함께하시는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이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하셨고, 지금도 우리를 향하신 계획이 있으시다. ‘근현대사 사진전’을 통해 대한민국 건국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 수 있어 너무나 감사하다. 이 모든 일을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린다.



<사진설명> 1948년 5월 31일 초대 제헌국회 개헌식 모습. 대한민국 국회를 기도로 시작하게 한 이승만 건국대통령부터 수많은 믿음의 선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대한민국 건국과 오늘날 발전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사용하고 역사하셨다.



위 글은 교회신문 <88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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