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된청년회 ‘원팀 요리사’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원팀’

등록날짜 [ 2026-02-03 14:52:17 ]
회심은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을 넘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겠다는 실제적 사고 전환
구주 예수 앞에서 믿음 지키길 당부
설날이 다가온다. 수천만 명이 움직인다. 고속도로는 막히고, 기차표는 동이 난다. 그래도 사람들은 간다. 고향이니까. 가족이니까. 귀성길 풍경은 늘 같다. 어떤 이는 아예 해외여행을 떠난다.
설·추석 연휴가 다가오면 마음이 복잡해지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차례상 멀찍이 혼자 서 있어야 하는 어색함. 친척들의 눈치. 술자리에서 벌어지는 다툼. 오랜만에 모인 가족인데 화평은 쉽게 깨진다. 비교와 시기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신앙을 지키면서 가족과 평화롭게 지내는 일이 왜 이리 어려운가.
문제는 절을 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나는 진정 회심한 사람인가. 내 사고방식은 정말 바뀌었는가.
애매하게 서 있는 유교적 그리스도인
한국 기독교인에게 이상한 모습이 있다. 주일에는 “주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찬송을 부르고, 설교를 듣고, 예물을 드린다. 그러나 설이나 추석이 되면 달라진다. 차례상 앞에서 머뭇거리고, 가족 사이에서 눈치를 본다. 평소의 확신은 어디로 갔는지 흔들린다.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 삶의 방식은 여전히 유교적인 그리스도인이 많다. 장례식장에서 드러난다. “돌아가셨다”라고 하면서 “좋은 곳에 가셨다”라고 위로한다. 어디인가. 천국인가, 극락인가, 아니면 막연한 저승인가.
연휴 기간에 친척들을 만나 건네는 인사에서도 드러난다. “조상님 덕분에 잘 살고 있습니다.” 정작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일은 잊는다.
무서운 것은 무지이다. 본인이 모른다. 유교적 사고방식은 공기처럼 스며들어 있다. 500년 조선의 유산이고, 문화이며, 일상이다. 의식조차 못 한다. 회심했다고 하면서도 유교적인지 모른 채 유교적으로 산다. 교회에 등록은 했으나 정신은 성균관에 남아 있는 셈이다.
공자가 말했다. “조상을 제사하는 데는 조상이 있는 것같이 하라.” 형식보다 진심을 강조한 말이다.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조상을 섬기는 일이 마땅하다는 전제이다. 보이지 않는 조상에게 마음을 다해 예를 갖추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의 전제는 다르다. 섬김의 대상이 다르고, 예배의 대상이 다르다. 보이지 않지만 살아 계신 분은 조상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여기에서 혼란에 빠진다. 절 대신 묵념, 제사 대신 추모예배로 형식만 바꾸고 끝낸다. 대체 의례는 답이 아니다. 형식이 아니라 사고방식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조상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 뿌리를 모르는 나무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기억하는 ‘방식’이 갈림길이다. 숭배인가, 존경인가. 여기에서 그리스도인과 유교인의 길이 나뉜다.
핵심은 하나! 누가 왕인가
네덜란드 수상이자 신학자인 아브라함 카위퍼르가 1880년 자유대학교 개교 연설에서 선언했다. “우리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만유의 주재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라고 외치지 않은 영역은 한 치도 없습니다.”
한 치도 없다. 직장도, 가정도, 명절도, 차례 상 앞도. 그리스도가 왕이시다. 우리가 아는 복음의 핵심이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바로 죄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간은 죄 아래 있다. 제사로 해결되지 않는다. 선행으로도 안 된다. 전통을 지킨다고 씻기지 않는다.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며, 그 끝은 영원한 심판이다.
조상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조상 역시 죄인이었다.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다. 제사상에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죄 문제는 그대로 남는다.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태초부터 계획하셨다. 창세기 3장 15절, 에덴동산에서 이미 약속하셨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부수리라. 구원의 약속이다. 구약 전체가 이 약속을 향해 달려간다. 아브라함의 언약, 다윗의 언약, 선지자들의 예언, 제사 제도까지 모두 오실 메시아를 가리켰다.
때가 찼을 때, 하나님이 직접 오셨다. 삼위일체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입으셨다. 성육신이다. 만유의 주재이신 분이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빌2:7). 어린양 대속제물이 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을 대신해 죽으셨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사53:5). 예수가 오시기 700년 전, 이사야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었다.
결정적인 사건이 있다.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죄가 없으셨기에 사망이 붙잡을 수 없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15:55). 바울의 외침은 승리의 선언이다.
조상과 그리스도의 결정적 차이가 드러난다. 조상은 죽었고 무덤에 있다. 예수는 부활하셨고 지금도 살아 계신다. 죽은 자는 왕이 될 수 없다. 산 자만 왕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실천하셨으며, 부활로 증명하셨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이고, 하나님의 은혜이다.
확실한 사고 전환 “예수만이 나의 왕”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가 왕이시다. 명절도 예외가 아니다. 가족 모임도, 차례상 앞도. 조상은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숭배와 존경은 다르다. 숭배는 신에게 드리고, 존경은 사람에게 표한다. 조상은 신이 아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고, 나보다 먼저 이 땅을 살다 간 사람이다.
조상을 기억할 수 있다. 감사할 수 있다. 그분들이 있었기에 내가 있다. 사랑할 수도 있다. 다만 숭배는 안 된다. 복을 빌어서도 안 된다. 섬겨서도 안 된다. 숭배는 오직 하나님께, 복은 오직 하나님께 구하며, 섬김은 오직 하나님께 드린다. 유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성경적 가치관이다.
회심은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만이 아니다. 사고방식의 전환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일이다. 바울이 고백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 회심한 자의 삶이다.
조상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감사하라. 기억하라. 사랑하라. 조상이 있었기에 내가 있고, 부모가 길러 주셨기에 내가 자랐다. 가족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효도는 성경이 명하는 덕목이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출20:12). 십계명의 다섯째 계명이다. 다만, 숭배하지 말라. 숭배는 오직 하나님께 드린다.
전통 자체가 나쁜 게 아니다. 전통 속에 담긴 가치가 있다. 가족의 소중함, 어른에 대한 공경, 세대를 잇는 책임감. 이런 가치는 성경과 통한다. 다만 전통이 복음을 가리면 안 된다. 전통 속에서 영원한 진리를 분별해야 한다. 그 기준이 성경이고, 그 진리가 복음이다.
사고방식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 설·추석 연휴가 더는 두렵지 않다. 가족 모임이 불편하지 않다. 정체성도 흔들리지 않는다. 왕이 누군지 분명히 알기에.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 분. 태초에 계획하시고 십자가에서 이루시고 부활로 증명하신 분. 삼위일체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왕이시다.
올 설에 당신은 누구 앞에 서는가. 죽은 조상 앞이 아니다. 살아 계신 왕 앞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936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