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성 만곡족 고쳐주신 하나님

등록날짜 [ 2004-01-05 15:57:01 ]

선천성 기형이라니
맏이 범진이가 태어났을 때 이상하게도 오른 쪽 발이 안쪽으로 45도 정도 휘어져 있었다. 친정 집 근처 시골 의사의 말로는 배냇짓이니 곧 괜찮아질 거라고 했지만 삼칠일이 지나도록 휘어진 발은 조금도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불안한 마음으로 서울 K대학병원 소아정형외과로 달려갔다. X-레이 촬영 결과 나온 병명은 ‘선천성 만곡족’. 1천명 중 1-2명 꼴로 걸린다는 선천성 기형의 발로 우리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이 아닌가! 교정 테이프, 교정 신발 등으로 교정을 하다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상태를 봐가며 2-3차례 수술을 받으면 뼈가 정상적으로 성장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범진이가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통해 받게 될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게 아팠다. 스물 여섯 살. 그리 길지 않은 내 인생에 왜 이렇게 자꾸만 시련이 닥쳐오는지 새삼 지난날의 아픈 기억들이 뇌리를 스쳐갔다.

불행의 그림자
단양 산골 마을에서는 제법 유복한 편에 속했던 우리 집안에 불행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무렵 남동생이 다섯 살에 뇌 암에 걸리면서부터였다. 여러 차례 대수술을 받고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간질 등 계속되는 고통으로 괴로워했다. 보다못한 부모님은 큰 굿을 자주 벌이며 미신의 힘에 의지하셨다. 하지만 동생의 상태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고 집안의 가세는 점점 더 기울어져 우리 2남4녀가 학업을 계속 이어갈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언니와 동생들을 위해 내가 희생할 결심을 했다. 가족들이 마음 아파할까 봐 “나는 공부하는 것보다 직장생활이 더 좋아”라고 말했지만 학업을 포기해야하는 나의 마음은 몹시도 아팠다.

그리고 22살 될 무렵, 갑작스레 맞게 된 아버지의 사고사, 그것을 비관하시던 할아버지의 죽음, 집안의 큰 기둥이었던 두 분의 이어진 죽음은 남은 가족들을 오랫동안 절망감에 빠뜨렸고 나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이십대 초반을 보냈다. 스물 다섯 살 때 남편을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땐 이제 내게서 불행은 사라지고 행복만 끝없이 펼쳐질 줄 알았다. 그런데 열 달 동안 내 태 속에서 고이 자라 세상에 태어난 사랑스런 아기 범진이가 선천성 기형이라는 불행을 안고 태어난 사실을 알았을 땐 모든 것이 내 탓인 것 같아 미치도록 안쓰럽고 괴로웠다. 남들에게 손해를 보았으면 보았지 손해를 끼친 적 없고 나쁜 짓 한 적도 없는데 왜 내 인생엔 자꾸만 이런 불행이 닥쳐오는 건지 누구에게 따져 물어야 속이 시원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구나
범진이가 백일 될 무렵부터 교정 신발을 신겨야 했다. 발바닥과 정강이에 쇠막대기를 댄 무거운 교정신발을 신은 범진이의 발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병원에 갈 때 외에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다. 젖먹이기 전에 교정 신발을 벗기고 30분씩 주물러 주어야 했는데 그 때마다 범진이는 숨이 넘어갈 듯 자지러지게 울었고 나도 따라 울었다. 매일 범진이와 씨름하며 눈물로 보내던 중, 하루는 반가운 손님 한 분이 찾아왔다. 처녀시절 믿음도 없이 일년간 군부대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알게 된 정윤옥 집사님이었다. 정 집사님은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하신 후로 연세중앙교회를 섬기고 계셔서 그분의 인도로 연세중앙교회에 등록하고 주일 낮 예배와 구역예배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교회 다닌 지 7-8개월이 지나도록 마치 유리벽을 사이에 둔 것처럼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신세한탄 하는 마음에만 사로잡혀 교회에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그러다 맞게 된 성탄절 전야예배, 그 날 따라 윤석전 목사님이 눈물까지 흘리며 전하시는 설교 말씀에 마음이 뜨거워져 교회에 온 지 처음으로 진실한 기도를 드렸다.

‘예수님, 저의 죄와 허물을 씻어주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데 저도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을 수 있도록 믿음을 주세요.’
바로 그 순간,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꼭 감고 기도하는 내 눈에 가시관을 쓴 분이 이마에 피를 흘리고 고통 당하는 모습이 선명히 보여졌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왜 그렇게 마음이 괴롭고 아프던지 나도 모르게 그만 그 자리에서 엉엉 울어버렸다.
‘아, 저분이 바로 나 때문에 가시관 쓰신 예수님이시구나!’ 하는 깨달음과 함께.

이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아
그 날 이후, 나의 예배드리는 태도는 180도로 달라졌다. 설교 시간은 나의 허물과 죄를 씻어주시려고 가시관에 찔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타이르시는 말씀 같아서 한 말씀도 놓치지 않고 ‘아멘!’ ‘아멘!’ 하며 눈물과 콧물에 범벅이 되도록 큰 은혜를 받았다. 구역예배도 진심으로 사모하며 드리던 중, 한번은 사모님을 모시고 연합구역예배를 드리는데 기도시간에 사모님이 내 머리에 손을 얹자마자 혀가 돌아가면서 방언이 터져 나왔다. 너무 신기하고 좋아서 집에 돌아와서도 방언 기도를 하려고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높이 들었는데 삼십 분이 지나도록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기도만 했다. 그렇게 뜨겁게 성령 체험을 하고 나니 언제 어디서나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지키고 보호해주시고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하나님 제발 범진이 다리를
1996년 새 해가 되었다. 첫 주일날, 새 해를 주신 하나님께 적은 예물이지만 정성을 다해 드리고 “남편이 예수님 믿게 해주시고 범진이의 발을 고쳐주세요!” 라는 소원을 빌었다.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께 어서 범진이 다리를 고쳐달라고 눈물로 기도하였다. 그로부터 두 달 후, 범진이의 교정 신발 바닥 쇠가 뚝 부러져버렸다. 아이가 자라면서 활동이 많아져서 그런가 보다 하고 별 생각 없이 수리를 해서 신겼다. 그 시기쯤에 병원에 들렀더니 교정 상태가 몹시 나빠졌다며 “이제부턴 일주일에 한번씩 꼭꼭 병원에 들르세요” 라고 했다. 둘째 범수를 낳고 몸조리하느라 범진이 발을 잘 주물러주지 못한 탓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2주가 지난 후, 또 교정 신발의 쇠가 부러졌다. 이번엔 정강이 쪽이었다. 무언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두려웠다. 범진이 다리를 주무르는 손이 떨리고 간절히 눈물의 기도를 드리던 중에 세미한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다. “범진이 발을 고쳐달라고 기도하면서 그렇게 신발을 꼭꼭 신겨놓으면 내가 고쳐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니?’

깜짝 놀랐다. ‘맞아! 내가 그랬지.’ 당장 그 자리에서 무릎을 끓어 믿음 없는 행동을 회개했다. 그리고 수리하려고 치워둔 교정 신발을 쓰레기통에 내다버리고, 매주 병원에 가려던 계획도 취소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매달려 하루에 대여섯 번씩 간절히 눈물로 기도 드렸다. 그렇게 3개월이 흘러간 어느 날, 낮잠이 든 범진이 다리를 주무르면서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입술에선 “범진이 다리 고쳐주셔서 감사합니다. 범진이 다리 고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기도가 끊이지 않고 삼십 분이나 계속 이어졌다. 내 영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진실한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하나님께서 범진이의 다리를 고치셨구나, 이제 범진이는 완전히 나았구나 하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어느 덧 6년이 지났다. 범진이는 올 해 초등학교 3학년이 되는데 운동신경이 남달리 뛰어나 달리기, 축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는 건강하고 씩씩한 아이로 자랐다. 이렇게 건강하고 씩씩한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주님께서 받으신 충성
3년 전인 1999년도 여름의 일이다. 은세공업 공장을 차린 남편의 일을 밤잠을 설쳐가며 도와주다가 손목 등 쪽 물렁뼈가 튀어 나와 시근거리고 아팠다. 병원에서는 절대 일을 하지 못하게 했지만 아이는 셋인데다 집안일 도와줄 사람 쓸 형편도 못되다 보니 일은 쉼 없이 이어졌고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매일 교회에 가서 기도하면서 혹시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나는 대로 회개하였다. 그러던 중 여름성회 기간이 다가왔다. 기도하는 중에 마음에서 ‘너 먹고사는 데는 손목뼈가 튀어나올 정도로 열심히 하면서 내 일이 바쁜데 쳐다보지 않느냐’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주님, 잘못했어요. 성회 때마다 충성자가 부족해서 잠을 설쳐가며 일해야한다는 말을 듣고서도 제가 무관심했어요. 이번 여름성회 때는 충성할게요. 아이도 셋이고 남편 일도 도와주어야 하니 화요일에 한번만 갈게요.’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약속했다.

중고등부 성회 때부터 충성은 시작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화장하고 아침에 범진이 범수를 어린이집에 맡겼다. 그리고 범성이를 업고 유모차를 챙겨 교회로 갔다. 교회에서 8시 30분에 출발했는데 수양관에 도착하니 10시가 다 됐다. 한나절이 그냥 지나갔다. 시골에서 일꾼을 얻으면 새벽부터 와서 일하고 참 먹을 시간이었다. 돈 받고 하는 일이라면 일시키는 주인에게 얼마나 부끄럽고 죄송할까 싶어 아침을 먹지 않아 배가 고팠지만 식사도 하지 않고 일을 시작했다. 손톱을 바짝 잘라서 큰 무를 씻을 때 피가 났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일을 했다. 유모차에 앉혀 놓은 돌박이 범성이는 내가 일하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졸리면 자고 잠이 깬 후에도 얌전하게 유모차에 앉아서 놀았다. 2시경, 범성이와 함께 점심을 먹고 아이는 유모차에 앉혀놓았다 그리곤 다시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잠시 허리도 펼 시간 없이 저녁이 되었다. 밤 9시경에 교회로 가기 위해 차를 탔다. 자리에 앉자마자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감사와 기쁨 때문에 차를 타는 내내 마냥 울었다. 나 같은 자의 충성을 주님께서 기쁘시게 받으신 것 같았다. 밤 11시경 교회에 도착했다. 집에 가보니 남편이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데려다가 라면을 먹이고 재워놓은 상태였다. 아침에 일어나니 팔 다리 어깨 안 아픈 곳이 없이 온몸이 쑤시고 아팠다. 그런데 아침밥을 하려고 쌀을 씻다가 무심코 손을 보았는데 이게 웬일인가! 손목 등에 툭 튀어나와 있던 뼈가 안 보이는 것이 아닌가! 시근시근하던 증세도 없어지고 말이다. 너무 신기하고 놀라워서 남편에게 보여주었다.

“이것보세요. 병원에서는 손을 쓰면 안 된다고 했는데 열심히 충성하고 왔더니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치료해주셨어요”
남편도 놀라워했다. 그 뒤로도 성회 기간 동안 내내 매주 화요일은 수양관에 충성하러 갔었다. 집에서 아기나 보지 무엇 하려 왔냐하며 핀잔을 주시던 집사님도 매주 가니 나중에는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정말 하나님과 약속하고 충성하는 것 같다고 하셨다.

남편을 세우시니
하나님께서 범진이 발을 치유하신 다음 해에 남편도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고, 그 해 연말 남전도회 기관기도모임을 통해서 성령체험을 하였다. 그 동안 믿음이 연약하여 넘어지기도 하고 시험에 들기도 했지만 목사님과 사모님께서 관심을 가져주시고 남전도회원들이 주님 심정으로 기도와 사랑을 아끼지 않으셔서 올해는 집사로, 기관의 부회계로 세워주신 것을 진정 감사 드린다. 그 동안 세상 방법으로 운영하여 어려움을 겪던 사업장도 남편이 주일을 성수하며 기도하니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일감들을 보내주신다. 모쪼록 남편이 주님 이름으로 주신 귀한 직분, 기쁨과 감사함으로 잘 감당하길 바라는 마음 그지없다. 나 또한 주님 사랑하는 마음 변치 않고 늘 깨어 기도하고 충성하고 전도하여 주님께 사랑 받는 자 되고픈 마음 간절하다. 지금까지 주님께서 그리하셨듯이 이 소원들도 응답하시리라. 부족한 자에게 간증할 수 있도록 은혜주신 주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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