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년간 전도관에 다녔으나

등록날짜 [ 2004-01-07 13:45:10 ]

27년간 전도관에 다녀
1948년에 인천에서 태어난 나는 열 살 때부터 27년간 사이비 이단 집단인 전도관에 다녔다. 전도관에서도 초창기에는 예수 이름으로 각색 병자들을 고치는 등 기이한 이적을 행했기에 6·25 전쟁 직후 헐벗고 배고프고 무엇엔가 갈급해 하던 한국강산 처처에 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전도관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던 중 박태선은 58년부터 “말세에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얻는다!”며 신앙촌을 만들어 신도들에게 집단생활을 하게 했으며, 신도들이 바친 재산과 노동력으로 신앙촌을 거대한 기업으로 확장시키고, 자신이 기도한 생수(生水)를 먹고 아픈 데 바르면 병이 낫는다는 등 비성경적인 행동을 했다.

우리 가족도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모두 신앙촌에 들어가서 살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그리움이 많았던 나는 중고교시절 “영 죽을 나를 살리려 그 영광 버리고 쓰리고 아픈 십자가 날 위해 지셨네”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찬양을 부를 때면 눈물 흘리며 날 구원하신 예수님께 감사 드리곤 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건만 박태선은 “기성교회는 타락했으니 오직 전도관에 다녀야 구원을 얻고 영생하게 된다”고 속였고 나는 이에 미혹을 받아 27년간 열심히 전도관에 다녔던 것이다.

남편도 신앙촌에서 만났다. 남편이 15살 소년일 때 큰시누이가 “서울에서 공부시켜주겠다”는 말만 믿고 따라온 곳이 신앙촌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이미 고등학교 때 신앙촌에 문제가 있다고 마음 문을 닫은 상태였고, 또 나름대로 선악과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지 못하자 하나님은 없다며 군 입대와 함께 신앙촌을 떠났다. 그 후 철저한 무신론자로 살았다. 그러나 나는 오직 전도관에 다녀야만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고 믿었기에 결혼 후에도 아이들 셋을 데리고 열심히 다녔다.

그러던 1980년 초반, 박태선은 사이비 이단 교주의 정체를 여실히 드러내는 해괴한 선언을 했다. “천상천하에 하나님은 나다! 예수는 마귀새끼요 성경의 98%가 가짜다!" 나를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이 마귀라니 정말 기가 막혔다. 전도관이 사이비 이단 집단임을 알게 된 수많은 신자들이 속속 전도관을 떠나갔으나 나는 엄청난 신앙의 혼돈에 괴로워하면서도 27년 동안의 잘못된 믿음의 습관대로 천부교(天父敎)로 이름을 바꾼 전도관에 일 년 반이나 더 다녔다. 천부교에서는 더 이상 예수라는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찬송가를 불러도 예수라는 말은 모두 빼고 불렀고, 성경은 거짓이라며 아예 보지도 않았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박태선의 비성경적인 행위를 보다못해 83년 천부교를 완전히 떠나올 무렵, 어느 새 나도 악한 영의 미혹을 받아 예수님에 대한 기억이 까마득히 지워져 가고 있었다.

27년이나 다니던 전도관을 떠나오고 나니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가 쉽지 않아 다니지 않았다. 89년도에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허전한 마음에 동네교회에 5년간 다녔지만 늘 손님 같은 존재일 뿐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내가 죽으면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
1994년 겨울은 내 인생에서 가장 춥고 무서웠던 시기였다. 그 전해 8월, 큰아들이 군 입대한 지 열흘 만에 남편이 중국으로 떠나자 마음이 몹시 허전했다. 남편은 가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88올림픽 이후 인건비가 올라 공장 운영에 차질이 생기자 공장을 중국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중국 현지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물건을 만들다 보니 초창기에는 자주 크레임에 걸려 자금회전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남편 대신 국내에서 거래처 돈거래를 맡아하던 나는 눈앞이 막막했다. 돈 갚는 날짜가 하루만 늦어도 큰일나는 줄 알고 살아왔는데, 돈 줄 날짜가 돼도 돈이 없으니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남편은 지병인 당뇨가 악화된데다 합병증으로 피부병까지 겹쳐 두어 달에 한번 집에 올 때마다 몸무게가 1킬로씩 빠져 있었고, 얼굴엔 병색이 점점 짙어져 너무나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남편의 병세가 그렇게 심하다 보니 마음적으로는 이미 나도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좀처럼 사업이 펼 기미가 없고 남편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니 밤마다 불면증으로 뒤척이다가 5층 아파트에서 아래를 한참씩 내려다보면 금방이라도 떨어져 죽어버리고픈 충동을 느끼곤 했다.

‘내가 죽으면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 자살하면 지옥 가는데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자살을 하나...’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처지가 이렇다 보니 사소한 일에 시험이 들어 다니던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그러다가 딸 소연이가 다니는 연세중앙교회에 대한 궁금증이 들어 1994년 11월 첫발을 딛었던 것이다. 몇 개월 동안 별다른 은혜를 받지 못하고 다니던 어느 날, 예배 시간에 윤석전 목사님께서 “내 주의 보혈”을 진심으로 찬양하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어린 시절엔 나도 목이 매이도록 진실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찬양했었다. 그러나 전도관에서 받은 미혹 때문인지 입술로는 주님을 찬양해도 마음에선 진실이 빠져 있었다. 그런데 그 날, 목사님의 진실한 찬양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목이 매이도록 주님의 보혈을 찬양했을 때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나를 위해 쏟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내 영혼을 흠뻑 적셨고 두 눈에서는 진실한 감사의 눈물이 흘러 내렸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주소서!” 그 후, 내 생활에 큰 변화가 생겼다. 예전엔 아침에 눈을 뜨면 무섭고 두려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피아노로 팝송이나 트로트를 자주 쳤지만 그 이후로는 조금이라도 예수님과 멀어지면 안 될 것 같아 찬송가와 복음성가만 쳤는데 치다 보면 어느새 4시간이 흘러가곤 했다. 그리고 밤낮없이 목사님 설교 테이프도 들었다. 매일처럼 그러다보니 죽을 것처럼 무섭고 두려웠던 마음이 차츰 사라지고 평안과 기쁨이 찾아왔다. 그러나 항상 그렇게 은혜의 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95년 여름성회를 몇 개월 앞두고 갑자기 내 마음에 변덕이 생겼다. 목사님이 싫어지고 교회에 가는 것도 싫어졌다. 그래서 여름성회에 다녀와서도 마음에 변화가 없으면 연세중앙교회에 그만 다닐 생각으로 흰돌산수양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참으로 놀라운 일이 내게 일어났다. 윤석전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기도하던 중에 성령충만함을 받아 방언을 말하게 되었던 것이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보혈로 죄사함 받은 깨끗한 심령에 임하셔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신다는 성령! 그 거룩한 성령을 충만히 받고 보니 두렵고 무서웠던 마음은 완전히 떠나가고 매일 매일이 그렇게 기쁘고 좋을 수가 없었다. 너무너무 기쁘고 좋아서 매일철야예배에도 다니고, 기도도 하고, 없는 가운데도 감사예물도 참 자주 드렸다. 어찌나 좋은지 자다가도 일어나 춤을 출 지경이었다. 남편은 병들고 돈은 없고 자살하고픈 인생 최악의 상태에서 연세중앙교회를 만났고 성령충만을 받아 내 영혼이 평안을 얻고 보니 그 당시 예배시간에 “주안에 있는 나에게” 찬양을 부를 때면 내 심정이 그대로 가사로 씌어진 것같아 부를 때마다 참으로 많은 은혜를 받았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갈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불신자 남편 돌아와
“앞으로는 자네 누님과 소연이의 생활비는 대주지 않겠네. 나는 중국에서 그럭저럭 살다가 죽을 거야!” 성령을 받고 보니 이제 제사 지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추석날 아침 소연이와 둘이서 추석축복성회에 다녀왔더니 시동생들과 동서들, 시누이네 식구들이 제사를 지내고 갔고, 화가 난 남편이 친정동생들을 불러다놓고 야단을 치는 소리였다. 다음날 남편은 나와 화해도 하지 않은 채 중국으로 떠나버렸다. 삼개월 후인 1995년 말, 도저히 자기 몸을 지탱할 수 없게 된 남편이 사업체를 관리자에게 모두 맡기고 한달을 작정하고 귀국했다. 형편없는 남편의 모습에 마음이 무척 아팠지만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채찍에 맞으신 예수님만 믿으면 낫는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딱 한번만 교회에 같이 가자고 설득했더니 뜻밖에도 남편은 그날밤 당장 매일철야예배에 가겠다고 했다. 서둘러 교회로 차를 모는 내 가슴은 방망이질하듯 두근거렸다. 나보다 훨씬 먼저인 20대 초반에 신앙촌을 떠나왔고 선악과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지 못하자 철저한 무신론자로 살아온 남편. “목사들은 다 사기꾼이야!”라며 무조건 비판하고, 내가 성령 받고 제대로 신앙생활 하려니 생활비도 안 대주겠다며 싫어하던 남편이 지금 나와 함께 교회로 향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날 내 가슴을 더욱 떨리게 한 것은 바로 윤석전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었다.

“기독교인이라면 왜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드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셨는가 라는 생각을 한번쯤 안 해 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온 몸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선악과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지 못해 하나님을 부인하던 남편이 수십 년만에 교회에 첫발을 디딘 바로 그 시간에 선악과에 대한 설교를 듣게 되다니!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죄를 지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값인 사망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으니 이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담이 구속사역의 공로자라는 것은 아니며 그가 저지른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해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단 한번의 설교를 통해 수십 년 간의 의문을 완전히 해소한 남편은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매일철야예배에 참석했다. 주일날은 오랜 불신생활을 청산하고 연세중앙교회 성도로 등록했다. 할렐루야!

남은 생애 주님 위해 살고파
“이 소리 들려? 이 소리 들리냐고?” “어, 그거 목사님 목소린데!” “나도 매일밤 하나님 말씀 듣는 재미로 살아.” 남편은 교회에 등록한 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철야예배에 나가 은혜 받다가 중국으로 돌아갔고, 구정성회 때 다시 와서 성령 충만함을 받아 방언을 말했다. 다시 중국으로 들어갈 때 담임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잔뜩 사가지고 가서 매일 밤 설교 듣고 기도하면서 은혜를 유지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그 후로도 담임 목사님이 본교회 성도들을 위해 성회를 열기만 하면 바쁜 일도 뒤로하고 중국에서 나와 은혜 받기를 사모하더니 곧이어 기쁜 소식들이 날아들었다. “나, 4킬로 살 쪘어!” “이번엔 6킬로 쪘어!” 주님이 주신 참된 기쁨을 맛본 남편은 매일 하던 폭음, 하루에 두세 갑씩 피우던 담배, 고스톱 등 밤새워 하던 잡기를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한다. 성령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버릴 수 있는 강한 의지를 남편에게 주셨던 것이다. 남편이 급속히 건강을 회복했고, 그렇게도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방해하던 사람이 이젠 복음 전하는 기쁨 속에 산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너무 늦은 나이에 주님을 만났으니 남아 있는 육신의 때를 남들보다 몇 배 더 주의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감동 속에 살고 있다오.”라고 고백하는 남편. 언젠가 중국에 가서 남편의 책상 위를 봤더니 “내가 원하는 한 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라는 글씨를 책상 유리에 끼워놓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중국 넓은 곳에 언제 어디든지 달려가서 주님에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남편. 하나님께서 그에게 중국의 많은 영혼들을 위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일할 수 있는 사역의 기회를 허락하시니 진정 감사할 뿐이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복음의 일을 위해 애쓰니 사업적으로도 수백 명씩 종업원을 거느리는 큰 공장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넘치도록 풍성히 채워주셨다.

오늘도 우리 부부는 하나님께 기도한다. 주님이 주신 남은 생애 동안 절대로 교만하지 아니하고 변치 않는 믿음으로 이제까지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충성되이 섬기며, 나와 남편과 우리 온 가족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가 넘치는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할렐루야!

위 글은 교회신문 <4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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