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감사

등록날짜 [ 2004-01-12 22:15:00 ]

베드로전서 1장 13∼25절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중략)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든지 우리 인간을 절대적으로 사랑하시고 하나님 안에서 보존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창1:27~30), (사53:5~6)은 지금도 여전하기에 우리 인간이 우주 만물 안에서 공기도 마시고 물도 마시며 만물을 누리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시121:5~6). 만약 낮의 해가 지구에 바짝 다가온다면 우리 인간은 그 강렬한 햇볕에 타 죽을 것이며, 밤의 달이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고 지구와 가까워진다면 바닷물이 육지를 덮어서 우리 인간은 도무지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121:7~8). 사고 많은 이 땅에서 만약 하나님이 지키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찌 이렇게 건강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키시는 목적은 우리가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도록 하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더 소중한 것은 바로 영원히 살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면 죽지만, 육체 속에서 육체를 움직이는 영혼은 영원히 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보존하시는 목적은 바로 우리의 영혼이 영원히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목적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 받을 존재로 태어나서 그 은혜 아래 행복의 극치를 누리며 살던 에덴동산이라는 축복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병도 없고, 아픔도 없고, 땀 흘려 일해야 할 필요도 없는 아주 행복한 동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행복을 불순종이라는 죄를 범함으로, 즉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형벌을 피할 수 없는 절망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도 자유하게 사는 것 같지만 죄를 범하는 순간 감옥에 끌려가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이렇게 세상에서도 죄지은 사람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듯이 하나님 앞에서도 범죄한 자는 그 영혼이 영원한 지옥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죄로 인한 인간의 멸망을 그냥 방치해버리신다고 해도 우리는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지키시고 사랑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죽음을 방관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살리겠다고 약속하신 말씀대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우리가 죽어야 할 대신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오신 목적은 바로 그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이천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셨으니 예수께서 흘리신 피는 우리 죄를 영원히 해결하신 증거입니다.

생명은 피에 있으니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그가 죽었다는 말은 곧 피를 흘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19~20). 옛날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라고 하는 휘장이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죄인인 인간은 도무지 휘장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고 죽으시는 순간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휘장은 찢어져 버렸습니다. 예수께서 피를 흘리시고 우리의 죄를 갚아 버렸기 때문에 죄의 담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우리 인간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 은혜로 하나님께 직접 나와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17:11). 죄는 인간의 생명을 죽였으나 예수의 생명의 피는 우리의 죄를 속하였으니, 예수의 생명의 피가 바로 죄를 해결하는 순간 우리의 생명은 살아났고 우리는 그의 피로 영원히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예수의 피에 대한 믿음, 곧 그가 날 위해 죽었다는 증거요,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3~55).
우리가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그냥 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 속에 그의 생명이 있고, 말씀 속에 그의 생애가 있으니 우리는 그의 말씀을 들으면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는 우리 죄의 해결사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한 것은 하나님 앞에 피가 없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15:9~16).
새 새끼 한 마리를 쪼개서 피 흘리지 아니하였기에 그의 후손이 애굽에 들어가 사백 삼십년 동안 종살이로 죽을 고생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행위, 특히 예배를 드릴 때에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은혜에 감사해서 드려야 합니다. 구약 시대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반드시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야 나갈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은 바로 예수가 나를 위해 흘리신 피의 공로를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인 것입니다.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13).
이스라엘 백성이 피를 흘리지 않은 제사를 드림으로 종살이를 하게 되었으나 종살이를 마감하고 나올 때도 바로 양의 피로 인해 애굽의 종살이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양을 잡아 피를 흘려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집안에서는 양고기와 쓴 나물을 먹음으로 장자가 죽어가는 재앙, 첫 새끼가 죽어가는 재앙이 임할 때에 그 피를 보고 죽음의 재앙이 넘어갔던 것입니다. 애굽의 모든 백성이 통곡하는 가운데 임금은 더 큰 재앙이 올까 두려워 이스라엘 백성을 고센 땅에서 데리고 나가도록 모세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그 피를 보고 나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어떤 수단과 방법으로도 우리의 죄를 해결할 수 없으나 예수의 피를 보고 믿는 순간 우리의 죄는 해결되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의 피는 우리의 죄의 해결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의 피가 없이는 지옥의 참혹한 고통을 영원히 피할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에 양의 피를 수용하셨듯이 시종일관 죄 문제를 해결하실 때에는 피를 찾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죄 값은 사망이며 죽음의 증거는 피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한 죽음에서 살리는 증거 역시 예수의 피인데 생명은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양의 피와 예수의 피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침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온 세상 죄,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양과 같이 피를 흘려 죽을 자라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에 피를 흘리는 양을 보고 죄와 저주를 해결했듯이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흘리신 예수의 피를 보고 단번에 모든 인류의 죄를 해결하여 구원하시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며, 인간을 향한 절대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죽도록 충성하라(계2:10)”고 말할 권리가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한 세상을 살다가 죽어야 한다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살리신 주님을 위해 충성하고 주님을 위해 살 때 그분이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은혜 받았다는 말은 그 은혜를 자기의 것으로 소유한 사람, 자기에게 이루어졌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이 사람은 주를 위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11~14).
왜 제사장의 제사는 죄를 없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양과 사람 중에 어느 것이 더 귀합니까? 물론 사람이 훨씬 더 귀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대신 양이 죽었다고 해서 사람의 죽음을 해결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양의 죽음은 곧 두 가지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죽는 양과 같이 죽어야 할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어린양과 같이 오셔서 나를 위해 죽으심으로 단번에 죄에서 살리실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류의 죄를 다 속하고도 남을 만큼 그분은 영원히 크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다할지라도 예수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만 힘입는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죽기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기 위해서 죽는 것이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죄의 종결, 저주의 종결, 지옥이 종결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예수의 피의 공로만이 하나님께 가는 길
예수의 피가 없이는 거룩함도 없고, 예수의 피가 없이는 영원히 멸망할 죄인이 구원받을만한 어떤 대책도 없으며, 예수의 피가 없이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남도 없고, 예수의 피가 없이는 영원한 생명도 없으며, 예수의 피가 없이는 도무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하셨습니다. 오직 예수의 피의 공로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인데 우리에게 그 길을 열어주시니 우리는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예수의 피가 없는 예배라면 그것은 하나의 의식이나 종교행사일 뿐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아닙니다. 우리는 예배가 절대로 의식이나 외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오직 나를 살리시고 구원하신 은혜에 대한 고백과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예수의 피가 없는 충성이 있다면 그것은 자기의 자랑이 될 뿐 하나님께서 기억하실만한 충성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의 피의 공로에 감사해서 충성한다면 아무리 충성해도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갚을 수 없어 그저 겸손해질 뿐입니다. 예수의 피의 공로를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리 감사를 해도 모자라겠지만 예수의 피가 없는 감사가 있다면 이는 많은 사람 앞에서 자랑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예수의 피를 망각한 어떤 큰 행위도 하나님과 자기의 영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무익한 행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후면 구세주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 날이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겟세마네 동산을 거쳐 가야바의 뜰에서 모진 매와 저주를 받으시고, 친히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바로 이 죽으심이 인류를 살리시려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피의 사건이니 이 사건이 나의 것이라면 우리는 언제든지 감사와 영광과 찬양과 충성으로 평생을 살아도 모자랄 것입니다.
“예수여, 어찌하여 나를 위해 육체를 입고 오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그 모진 매를 맞으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위해 그 값지고 고귀한 피를 흘려 나에게 아낌없이 생명을 주셨습니까? 내가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이란 말입니까? 무익한 나를 무조건 사랑하셨으니 나도 주를 위해 죽도록 충성하며 살게 하옵소서. 지난 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에 무관심했음을 용서하옵소서. 내가 다시 새롭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나 그 피에 감사하며 충성하며 전도하며 찬양하며 내 평생 주를 위해 살게 하옵소서!”

위 글은 교회신문 <5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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