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여전도회 2024 결산총회
한 해 영혼 구원에 사용해 주심 감사
등록날짜 [ 2019-02-20 01:54:53 ]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잠시 동안의 육신의 때를 위한 방주의 구원 주셨지만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피 공로로 영혼 영원히 살리신 속죄의 은혜를 주셔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신 예수라는 신령한 방주 안에서 행복한 성도가 되기를
창세기 6장 13~22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그 방주의 제도는 이러하니 장이 삼백 규빗, 광이 오십 규빗, 고가 삼십 규빗이며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찌니라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 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 하라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값지게 사용하시려고 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과는 달리 인간에게 인격과 언어를 주셔서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를 지으신 목적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에게 에덴동산에서 만물을 자유하게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 권리를 부여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이런 큰 은혜를 입고도 감사할 줄 모르고 마귀에게 속아서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악과를 먹어 하나님에게서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같이 죄를 지어 불의한 인간이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기에 그 죗값으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죗값은 사망’이므로 영원한 죽음이 오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에게 닥친 저주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서도 영육 간의 저주 속에 살다가 영혼의 때에는 고통이 쉬지 않는 지옥에 가서 영원히 살아야 할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에덴을 떠난 후부터 인간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디서 살아야 할까, 육신의 의식주만을 걱정하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생각이 항상 하나님과 적대적으로 되고,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고 맙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요일3:8)라고 했으니, 마귀처럼 하나님과 적대적으로 된 것입니다.
인간은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한 것만 나타내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恨歎)하시고 마음에 심히 근심하시고 지면에 기식(氣息)하는 사람과 공중의 새들까지도 쓸어 없애 버리기로 작정하셨습니다(창6:5~7). 공중의 새가 무슨 죄가 있고, 육축이 무슨 죄가 있어서 그것들까지 다 쓸어 버릴 작정을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만물을 주셨으니 그것들은 아담의 소유입니다. 아담의 것이 다 마귀에게 속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되니 더는 지구상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쓰고자 하는 목적, 영광을 받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됐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인간을 향한 무서운 저주요, 용서할 수 없는 심판입니다.
육신이 구원받은 노아의 방주
그러나 당대에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산 노아였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창6:6). 다 죽여 없애기로 작정했는데 노아만 살려 주겠다고 노아에게 선포하셨으니, 그가 은혜를 입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가 사랑하는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명하시고 방주의 제도(製圖)를 주셨으니 노아는 그 제도대로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습니다(창6:14~16).
상식적으로 잣나무와 역청 두 가지 재료로만 지은 방주가 모든 문이 닫힌 후 전 지구적인 홍수로 물 위에 떠올랐을 때, 그 휘몰아치는 엄청나고 거대한 풍랑을 어떻게 견뎠을까요? 물에 뜨면서 쪼개질 수밖에 없는 나무로 된 방주. 세상 짐승이 암수 한 쌍씩 타고, 노아 여덟 식구가 탔으며, 그 모든 것이 일 년 넘게 먹을 양식까지 실었으니, 방주가 물 위에 떴다는 자체가 인간의 생각으로는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지으라는 말씀대로만 순종하면, 그 방주는 하나님 말씀이 깨지지 않는 것처럼 절대로 부서지지 않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께 어떤 질문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현실 상황과 여건이 어떻든지 질문 없이 순종할 때, 곧 그 순종이 우리의 방주가 되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다 짓자 홍수가 시작됩니다. 온 인류는 홍수에 휩쓸려 다 물에 빠져 죽었고, 구원받은 자는 방주를 지은 노아와 그의 가족 여덟 식구뿐이었습니다. 창세기 7장 24절에 보면, 홍수로 물이 창일(漲溢)한 날이 150일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물이 지구 위에 많이 찼는데, 그 긴 날 동안 살아 있을 짐승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왜 다 쓸어 버렸을까요? 하나님이 바라볼 때 그들은 전부 쓰레기 더미 같은 정욕의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느 때 내 목숨이 끝나서 주 앞에 갈지 모르니 다른 것은 몰라도 ‘나는 영적인 존재요, 주님이 창조한 피조물’임을 깨닫고, ‘나는 주를 위해 살다가 육신을 벗을 때 천국에서 영원히 살리라. 과거에 내 범죄는 피 흘리신 예수께서 속죄하셨으니 나는 그 피의 공로 붙잡고 천국에 가서 살리라’ 다짐하는 영적 희망이 가슴 속에 넘쳐 나기를 바랍니다.
노아가 믿음으로 순종하였고 그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으므로, 하나님 앞에 증거를 보임으로 세상을 완전히 정죄하고 세상과 분리돼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 믿음의 후사(後嗣)가 되었다고 히브리서 11장 7절에 말했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히 11:7).
노아가 가진 믿음의 증거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면 사는구나. 다른 사람들은 불순종해서 죽었구나’, 다시 말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창조자가 피조물을 어떻게 사용할 권리가 있는가. 나는 피조물로서 창조자에게 어떻게 사용당할 의무가 있는가. 주님이 나를 위해서 피 흘려 죽으시고 나를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하시고 그 핏값으로 나를 사심으로 내가 지옥 신세를 면하고 마귀·사단·귀신의 손에서 나와 영생과 천국을 얻었으니, 나를 피로 사신 그분에게 어떤 자세와 어떤 처지로 공경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할까’를 제대로 알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격을 가졌으니 이 생각을 놓치지 말고 항상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음을 한탄하지 않고 기뻐하시게 하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주신 신령한 방주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 앞에 믿음의 증거를 가진 노아라도 속죄의 은혜는 입지 못했습니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왔다고 해서 죄를 사함받았습니까? 당대에 의로운 사람이라고 해서 속죄받아 진정으로 의로운 사람이었습니까? 그저 홍수로 멸망하지 않고 살아남은 육신의 구원을 받았을 뿐, 여전히 아담의 원죄와 자기가 범한 죄, 육신의 소욕에서 나타난 정욕의 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할 의지가 전혀 없는 사람이었기에 의롭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노아보다 더 좋은 방주를 주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로 주신 속죄의 은혜입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벧전 3:20~21).
노아가 이렇게 받은 은혜는 방주에서 구원받은 자가 겨우 여덟 명뿐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로 구원받은 수는 엄청나게 많습니다. 예수라는 이 어마어마한 방주에 탄 것을 축하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주신 신령한 방주에서 그의 말씀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니, 곧 영원한 양식이요, 영원한 생명을 먹는 자들입니다. 이 방주 안에서 영원히 예수와 함께 살 생명 있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홍수에서 구원할 때 ‘방주’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더 좋은 것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죽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이니, 우리가 얼마나 복 받은 사람들입니까?
옛날 아벨이 믿음으로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하고 그 형에게 시기 질투를 받아 죽임을 당하자 그 핏소리가 하나님 앞에 호소했다고 성경은 했습니다(창4:10). 양을 잡아 피 흘려 드린 제사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증거로, 아벨이 죽자 그의 핏소리가 하나님께 사무쳤다는 것입니다. 아벨이 양을 잡아 피 흘려 드린 제사로 자기의 핏소리를 하나님께서 듣게 하고, 자기를 하나님께 기억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멸망할 죄를 담당하고 피 흘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 그의 영원한 생명의 핏소리가 우리를 변호하였습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代言者)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했습니다. 아벨은 자기 핏소리로 하나님 앞에 호소했으나, 우리는 내가 예수의 피의 공로로 죄 사함받았다고 피 흘리신 예수께서 직접 대언(代言)해 준다는 것입니다. 이 복을 감당할 수 없으니 의롭게 사시기를 원하며, 이 복을 주신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일러스트 / 박철호
속죄의 피의 방주
노아의 구원은 땅에서 완성한 방주에 초청된, 잠시 동안의 육신의 때를 위한 구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만세 전부터 예비된 신령한 방주로 초청된 것이요,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고 그 생명의 피를 흘려 우리 영혼을 영원히 살리신 구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충만한 방주에 초청되었으니, 방주 안에서 먹을 양식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의 살과 피입니다. 오늘도 그 양식을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심을 감사하며 내 영혼이 부유를 누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구원 받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하신 ‘속죄의 피의 방주’에 초청된 사람들입니다(롬5:9). 우리는 ‘용서’받은 자가 아니라 ‘속죄’받은 자입니다. 용서는 죄를 두고 그냥 없는 것으로 하자는 것이지만 속죄는 완전히 죄를 없이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용서(容恕)’와 ‘속죄(贖罪)’를 제대로 알게 해 주신 예가 바로 일만 달란트 빚진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일만 달란트는 오늘날로 치면 대략 25조 원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채권자는 채무자가 이 많은 빚을 못 갚을 줄 알고 그냥 없는 것으로 하자고 하며 놓아줍니다. 그때 빚진 자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가 길을 가다가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습니다. 데나리온은 장정 하루 품값이니 자기가 탕감받은 금액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적은 금액입니다. 그런데도 당장 갚으라고 겁박하다가 못 갚자 옥에 넣고 말았습니다. 그 소문이 일만 달란트 탕감해 준 사람의 귀에 들어가자 그를 당장 잡아오라 해서 일만 달란트 빚을 다시 적용해 버립니다. 이 예화에서 일만 달란트 빚을 다시 적용한 것처럼 ‘용서’는 죄를 완전히 없이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없는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든지 다시 죄를 물어 형벌을 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냥 없다 한 자가 아니라 빚을 싹 다 갚아 버린 자입니다. ‘죗값은 사망’이기에 우리는 죗값으로 모두 사망에 이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도 천국 갈 사람 없이 마귀에게 속해서 전부 죗값으로 지옥 가야 하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셔서 내가 사망할 죗값을 갚아 버렸으니 우리는 용서받은 자가 아니라 속죄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자유한 사람입니다. 왜 영원할까요? 예수님이 내 죄를 다 갚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죄를 지었든지 예수의 피는 그 모든 죄를 갚고도 남으니 우리는 회개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죄의 결박에서 풀어졌습니다.
그런데 노아는 방주에서 죄를 사함받았습니까? 홍수가 세상을 덮은 210일 동안 방주 안에 있으면서 그는 그저 자기와 자기 가족이 산 것뿐입니다. 노아는 방주 짓는 데 10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으나 하나님 말씀의 약속을 받지 못하고 그저 증거만 받았을 뿐이지만, 우리는 예수께서 피 흘려서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사야서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이 약속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내 죄를 무효로 했습니다. 이토록 그가 하신 약속을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와서 다 이루어서 내게 주셨으니, 우리의 방주는 어디 있습니까? 바로 내 안에 성령으로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라는 신령한 방주 안에서 행복한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는 찔려서 우리 허물을 없애 버렸고, 상함을 당해서 우리가 당할 징계도 없애 버렸습니다. 그가 저주받아 우리가 당할 저주도 없애 버렸습니다. 십자가에 피 흘려 죽어서 지옥 갈 죄도 다 없애 버렸습니다. 우리는 이 축복의 방주에 타 있습니다. 이 방주는 가라앉지 않고 영원합니다. 이 방주 안에 천국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창세기 6장부터 시작된 노아의 사건을 읽을 때마다 항상 깨닫는 점이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는 자기들이 멸망할 때까지 집 짓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자기들이 볼 때 아름다우면 모두 아내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자기들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온통 미쳐 있고, 성적으로 극도로 타락해서 하나님을 기억에서 까마득히 잊었으니, 아무리 돌이키려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하나님을 알아본 사람은 노아 한 사람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방주에 타서 나는 거룩하여 죽을 수 없는 사람이요, 영생할 사람이요, 천국에서 영원히 살 확실한 방주에 탄 사실을 인정하기 바랍니다.
로마서 5장 9절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5:9~10)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이루어졌습니다. 죽음에서 벗어난 우리가 그의 피의 방주에 탔다면, 우리 양식은 그의 살과 그의 피요, 우리가 살아야 할 법은 그의 말씀입니다. 그는 항상 내 안에서 성령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천국까지 보존할 것이니, 예수 피의 방주에 타신 여러분 정말로 축하합니다.
노아의 방주는 온갖 수고와 노력을 다 하고 자기 전 재산을 사용해서 순종함으로 지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탄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방주를 짓는 일에 우리의 수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 수고 없이 공짜로 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라는 방주에 탄 이상 그 은혜에 감사하기에 주님 앞에 아무리 큰일을 한들, 그분이 목숨을 대속물로 줘서 나를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하신 은혜 앞에 초라한 존재일 뿐입니다. 주님께서 흘린 피로 이루신 구원의 방주에 탄 것만도 갚을 길 없는 은혜, 한량없는 은혜이기에, 그 은혜만 우리 안에 있을 뿐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19절에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 큰 은혜는 은금으로 된 것이 아니고 어린양의 보배로운 피로 됐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감사가 내 속에서 뜨겁게 치밀어 올라와야 합니다. ‘이 은혜 갚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가 주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해야 은혜받은 사람답게 인격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 이 마음이 내 속에서 사무쳐 올라와야 합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가지게 한 생애 전부가 우리의 영혼에는 구원의 방주가 되었으니,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믿기만 하면 이 방주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왜 피 흘렸나요? 나 지옥 가지 말라고 내 죄를 짊어지고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이 방주에 아무나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죄인은 절대 못 들어갑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 죄를 위해 예수께서 대신 피 흘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고 인정하기만 하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최후 심판의 그 날, 주님 재림의 그 날 부활이라는 방주에 들어가려면
경건한 행실과 거룩한 사람, 하나님이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새 하늘과 새 땅, 완전한 방주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이 시대에 우리 믿는 자들이 사모해야 할 신령한 방주가 있습니다. 바로 주님 오시는 날 신부의 믿음으로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열릴 이 방주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을 거룩하게 하고 점도 흠도 없이 준비해서 자격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최후의 그 날, 주님 재림의 그 날과 함께 준비된 첫째 부활이라는 방주에 들어가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3장 7~13절에 간곡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하늘은 불에 타서 없어지고, 지구는 체질이 녹아 없어질 날이 머지않아 다가옵니다. 지금도 지구 속에는 엄청난 용암이 파도치면서 지구 표면을 깎으면서 올라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터지는 것이 지진입니다. 이만큼 말세에는 지진이 지구 도처에서 난다고 말씀했는데, 지금 세계 곳곳에서 지진이 일어난다는 소식은 땅이 풀어지고 하늘이 떠나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징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온 힘을 쏟아야 합니다.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지구는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을 때, ‘경건한 사람이냐, 거룩한 행실로 산 사람이냐’, 이 두 가지가 답입니다. 그날에 거룩함에 흠이 없고, 경건함에 흠이 없고, 의로움에 흠이 없는 사람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속죄의 피의 방주에 초청됐으면, 이제 주님이 재림하신 후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완전한 방주에 들어가 거기서 다 같이 만나야 합니다. 거기는 마귀가 없는 곳, 죄가 없는 곳, 질병이 없는 곳, 육체로 가는 곳이 아니라 부활한 몸으로 가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 갈 사람이 누구입니까? 경건한 행실과 거룩한 사람! 하나님이 바라볼 때 의에 거하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12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