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사명

등록날짜 [ 2019-03-12 17:51:11 ]

예수 피의 공로를 만나 죄 사함 받고 천국 가게 만드는 것이 교회가 할 일
교회는 그리스도의 역할과 사명을 다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역사가 나타나야
하나님 말씀 듣고도 애절한 회개 안 나온다면 설교한 자나 듣는 자 모두 잘못


사도행전 2장 36~41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여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본문은 오순절날 성령을 충만히 받은 베드로가 예수를 죽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한 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베드로의 이 설교를 듣고 회개하고 침례를 받은 수가 삼천이나 되었다고 했기에 베드로의 설교를 시작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세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믿음 없는 제자들
복음서를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 4개월 동안을 따라다녔으면서도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못 알아듣고 엇박자를 낼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도 예수께서는 그들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자기가 십자가에 달려 인류의 죄를 해결하고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고, 그들이 성령으로 장악당할 때 성령의 인격과 성품을 가지고 자신의 증인이 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를 직접 눈으로 보았기에 증인이요, 직접 만났기에 증인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고 나환자도 깨끗케 하는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좇았으면서도 예수께서 “죽으러 왔다”고 여러 번 하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께서 떡을 떼면서 말씀하시기를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는데도 묻지도 않고 먹습니다. 또 잔을 나누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하는데도 평소 식사하듯이 합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자신의 심정을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어도 제자들은 모릅니다.
만찬을 마치고 감람산으로 올라가시면서 예수께서는 또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십니다. 그때 베드로가 나와서 “다 주를 버린다 해도 저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호언장담 합니다. 이 말을 듣고 예수께서는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라고 대답하십니다.


오늘날 우리도 성령이 충만할 때는 주를 위해 목숨이라도 내놓을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면 달라질 때가 많습니다. 주를 향한 고백이 자기를 속이고 하나님을 속이는 거짓말이 될 뿐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결단과 각오를 했지만 그것이 나의 신념으로 바뀌는 순간 그 고백은 가짜가 되고 맙니다. 신념은 자신이 할 수 있다는 믿음을 나타내는 것이요, 신앙은 하나님이 나에게 역사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나타냅니다. 신념은 무너져도 신앙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만약 무너졌다면 신앙생활을 신념으로 한 것입니다.


예수를 증거하는 성령
예수께서는 제자 중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기도하러 가십니다. 기도하러 올라 가시면서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돌을 던지면 떨어질 만큼 제자들과 거리를 두고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애절하게 기도했던지 땀이 땅에 떨어지면서 핏방울같이 될 만큼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래도 마음이 허전하셔서 제자들이 기도하는가 봤더니 졸고 있습니다. 3년 4개월 동안 예수를 따라다녔으면서 제자들은 주님의 심정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만큼 제자들에게 예수를 아는 지식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자기들 혼자 믿는 신념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잡히시자 예수를 부인하고 떠난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마가다락방에서 불이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임하듯 성령을 충만하게 받았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합니다. 성령이 그들을 완전히 장악할 때, 그동안 예수와 함께 다니면서 봤던 것, 들었던 것, 예수께서 말씀했던 것들이 다 생각나면서 ‘아, 우리가 예수를 잘못 알았구나’라고 철저히 회개하고 예수를 바로 알게 됩니다. 이처럼 예수는 성령의 지식으로만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시고 제자들은 두려움과 무서움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십자가에 못 박아 잔인하게 죽인 자들이 예수의 제자들도 색출해서 그와 똑같이 죽이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말씀하셨기에 성령이 임하길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성령이 임하자 성령은 그들을 끌고 예루살렘으로 나갔습니다.


마음이 찔리는 회개
본문은 베드로가 성령에 이끌려 마가다락방을 박차고 예루살렘에 나가 담대하게 설교한 내용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의 온 집안들이여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영혼을 다스리는 왕이요, 우리 죄를 속죄하는 제사장이요, 하나님 말씀을 전하여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선지자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도 반드시 그리스도의 역할과 사명을 다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를 가지고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며, 구원을 이루는 회개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선지자의 사명을 가지고 죄를 지적하고 깨닫게 해서 회개시켜 예수 피의 공로를 만나 죄 사함 받고 천국 가게 만드는 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베드로의 설교가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들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죽일 만큼 강퍅한 자들에게 어떻게 회개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베드로가 전한 말씀이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성령의 소리였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찔린 그들은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다급하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묻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죽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요, 구세주인데 그가 다시 살아났으니 우리에게 보복할 텐데 우리는 살길이 없겠구나!”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계실 때도 죽은 자를 살리고 나병환자를 고치고, 중풍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신, 말씀한 그대로 하는 분인데 그런 분을 죽였으니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과실로 사람을 죽여도 살인자가 돼서 무서운 형벌을 당해야 하는데, 메시아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였으니 얼마나 절박했겠습니까? 이들은 예수를 보복하는 자로 오해했던 것입니다. 예수는 보복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를 죽이는 자도 구원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는 중에도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인류를 구원하신 구세주의 마음입니다.


내가 예수를 죽인 자 “어찌할꼬?”
“어찌할꼬?”라는 말 속에는 “이런 큰 죄를 졌으니 그분 앞에서 어찌 살길이 있겠느냐. 그러나 혹시라도 살길이 있으면 말해 달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찌할꼬?”라고 한 것은 “내가 어찌하여야 구원을 얻겠느냐?”라는, 살고 싶은 절박감에서 묻는 말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베드로는 거침없이 “회개하라”고 외칩니다. 하나님 아들을 죽인 살인자로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짓고 지금 죽느냐 사느냐 하는 처지에 놓여 있는 그들에게 회개하면 산다고 할 때, 그냥 적당히 회개하겠습니까? 예루살렘이 떠들썩할 정도로 가슴을 찢는 통곡의 회개로 몸부림을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들만 주님을 죽였습니까? 우리도 예수를 죽인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내 죄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잡히시고 빌라도 법정에 서셨을 때 수많은 무리가 예수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당시 이스라엘 지도자였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장로, 랍비들이 예수를 죽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만 예수를 죽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내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으니 나도 예수를 죽인 자입니다. 나는 예수를 죽인 자요, 또한 그 생명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설교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고서도 “어찌할꼬?”라는 애절한 회개가 안 나온다면 설교한 자나 듣는 자나 다 잘못입니다.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찔리고 상하고 징계 받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서 잔인하게 피 흘려 죽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구세주임을 나타내기 위해서요, 우리에게 구속의 은혜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야 할 만큼 죄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는 “너희는 내가 죽어야 할 만큼 죄인이다”라며 강력한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사건입니다. 죄인임을 깨달았다면 이제 자신의 영원한 생명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죽인 자들이 하나님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이 두려워 “어찌할꼬?” 하며 회개했듯이 우리도 그런 회개가 터져 나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여러분 가슴속에 정말 하나님 말씀을 듣는 순간 “어찌할꼬”라는 두려움이 있습니까. 그 두려움이 없다면 절망적인 자입니다. 우리는 예배할 때마다 말씀을 듣고 주님 뜻대로 못 산 죄를 항상 발견해야 합니다. 항상 말씀으로 자기를 점검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피로 주신 예수의 은혜를 배신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예수의 피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일러스트 / 박철호


십자가의 죽음으로 주신 은혜
어떤 때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을 마음속으로 생각해 봅니다. 모진 매를 맞는 장면은 생각하기도 마음이 아픕니다. 말뚝에 손이 묶여서 피할 수도 없이 맞아야 했습니다. 채찍도 그냥 채찍이 아니라 그 끝에 뼈나 쇠 조각이 달려 있었습니다. 한 번 내리칠 때마다 채찍이 몸을 확 휘어 감으면서 채찍의 여러 가닥에 박힌 쇠가 살에 팍팍 찍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이런 매를 마흔에 하나 감한 서른아홉 대를 맞으셨으니 갈빗대가 훤히 나올 정도로 살이 헤어지고, 피가 쏟아져서 숨쉬기도 힘들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자기가 죽어야 할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습니다. 수없이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 가까스로 그 길을 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왜 그렇게 하셔야 했습니까? 그렇게 해야만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일에 그가 찔려서 우리 허물을 해결해 버리고, 그가 상해서 우리 죄악을 담당하고, 그가 내가 받을 징계를 대신 받아서 내 징계를 무효로 하고, 그가 나무에 달려 저주받아서 내 저주를 무효로 하고, 채찍에 맞아서 내 질병을 무효로 하고 피 흘려 죽으셔서 사망과 지옥과 마귀를 멸하시고 부활하셔서 그것들을 정죄하여 버리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모진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으니 그 은혜를 입은 우리도 만약 십자가에 달려 죽는 일이 있다면 그렇게 죽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는 예수가 짊어지고 죽고, 나는 회개해서 속죄함을 얻고 예수가 주신 생명으로 새 생명을 얻어서 영원히 살게 되었으니 참으로 염치없지만 내 평생 예수 죽인 죄를 회개하고 감사하며 감격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과 지옥의 신세를 면하고 의와 거룩함과 선하심과 신령함과 하늘나라 영생을 얻었고 천국이 내 것이 되었으니 이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베푸신 은혜는 갚을 길이 없는 은혜요, 한량없는 은혜입니다. 이런 엄청난 은혜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는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요, 이 소식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구령의 열정을 가진 자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침례와 성령 충만
베드로는 회개를 촉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왜 침례를 받아야 합니까?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난 후 반드시 침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침례는 예수의 은혜로 죄 사함 받은 자들의 고백입니다. 물속에 들어가면서 “주님이 나를 위해서 이렇게 죽었다. 예수께서 내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일어나면서 “우리 주님이 내 죄를 사하시고 해결했으니 나는 이제 죽을 이유가 없다. 주님의 은혜로 내 죄가 사라졌으니 나도 주님처럼 부활한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 침례입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로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실제로 피 흘려 죽어서 무덤 속에 들어갔다 3일 만에 부활했지만 우리는 물속에 들어갔다 나옴으로써 예수와 동일한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로 죽고 예수로 다시 살았음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또 뭐라고 했습니까?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았다는 것은 예수 십자가의 피의 공로를 입었다는 증거입니다. 회개하여 죄 사함 받은 증거입니다. 또 성령을 받으라는 것은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과거의 죄악 된 인생으로 살지 않게 하시고 성령의 성품과 인격과 특성으로 살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다시는 죄로 다시 돌아가지 않도록 우리를 꽉 붙들고 인도해 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도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직접 우리 안에 교수로 오셔서 평생 가르치고 인도하여 세속에 빠지지 않도록 나를 장악해 준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장악하시는 이유는 다시는 은혜 밖으로 못 나가게 하기 위함
성령을 선물로 받으란 말은 회개하고 얻은 구원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라는 말


성령께 장악당하라
어렸을 때 성령에 장악당하면 작은 죄도 거리껴지면서 죄를 짓지 않습니다. 배고프던 시절이라 죄라고 해야 남의 집 울타리에 있는 감을 따 먹거나 고구마를 캐먹는 것입니다. 밭에 무가 자라고 있으면 먹으면 빈속이라 속이 쓰릴 걸 알면서도 캐서 먹은 죄밖에 없습니다. 또 아이들하고 싸움질하고 욕하고 때리는 그런 죄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성령을 받고 그분께 장악당하니 그런 일들이 다 죄인 줄 깨닫게 되고 통곡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하니까 아무리 배고파도 남의 것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애들하고도 싸울 일이 없습니다.
성령이 임하여 그분이 나를 장악할 때 그 장악력이 죽을 때까지 유지돼야 합니다. 성령께서 이처럼 우리를 장악하시는 이유는 예수 피로 구원한 내 영혼을 성령이 장악해서 다시는 은혜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1절에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믿음 안에 있다가도 미혹하는 영이 계속 믿음에서 떠나게 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거리가 멀어지면 감각도 없어집니다. 그러다 경계선을 넘어서면 다시는 회개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반드시 경계선을 넘지 않도록 감동, 감화하십니다. 설교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어떻든 예수의 피로 구원한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내게서 영원토록 떠나지 않고 인도하십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14:16~17).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라는 말은 회개하고 얻은 구원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성령을 모신 자로서 영적 품위를 지키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항상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인격과 성품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 밖에 나가면 어느 때인가 타락해서 세속적이고 정욕적인 사람이 되고 맙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이 말을 듣고 침례를 받으매 이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 하더라”(행 2:41)고 했습니다. 교회의 사명은 부지런히 전도해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교회는 예수의 제자를 계속 만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죽인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겸손하게 서로 종노릇해야 합니다. 십자가 은혜에 보답할 수는 없지만, 피 흘리신 은혜로 구원받은 자로서 예수를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를 드러내는 일이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사명입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61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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