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청년회 에스크(ASK) 종강예배
캠퍼스 위해 기도하게 하신 주께 영광
등록날짜 [ 2011-07-20 14:18:54 ]
총독이자 감독으로 니케아 신조 지지
교회가 국가에 흡수되지 않도록 막아
교회의 균열
400년 무렵, 교회 지도자들은 ‘섬기는 지도자’에서 ‘섬김을 받는 지도자’로 변질하기 시작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광범위한 권력을 얻었다. 그 권력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 위에 군림했다. 그 결과, 상당수 교회에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 균열이 발생했다. 많은 교회 지도자가 성직자들이 미혼으로 남기를 기대하면서 그 균열은 더욱 선명해졌다.
이때 이런 균열에 반대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조비니안(Jovinian)이라는 수도사였다. 그는 성(性)이 죄가 아니므로 신실한 배우자와 결혼 생활을 해도 일평생 동정(童貞)을 지키며 독신으로 사는 것처럼 영원한 상급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예수의 어머니가 일평생 동정을 지키며 처녀로 살았다는 주장에 반대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사람들의 공감을 사지 못했다. 결국 그는 교회에서 쫓겨났고, 그로부터 12년 뒤 쓸쓸한 죽음을 맞이했다.
5세기를 지나면서 서로마 교회 지도자들은 더욱 강력한 정치권력을 얻었고, 그에 따라 평신도와 성직자 사이의 간격도 더 넓게 벌어졌다. 어떻게 성직자들이 정치권력을 얻은 것일까? 야만인들이 로마 속주로 속속 이주해왔지만 황제의 통치력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교회 지도자들은 한때 로마 총독들이 맡던 책무를 자신들이 떠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진설명> 서기 370년 경 밀라노 총독이자 감독인 암브로시우스는 교회가 국가에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곤경에 처한 서방교회
이처럼 혼란한 시기에 강력한 권력을 행사한 교회 지도자 가운데 암브로시우스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370년 경 이탈리아 밀라노 총독이었는데, 자기 입으로 그리스도를 고백하지는 않았으나 니케아 신조를 믿었다.
밀라노 감독이 죽자 아리우스 추종자와 니케아 신조 지지자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했다. 각각 진영은 자기편을 새 감독으로 선출하려고 팽팽히 대결했다. 그들이 대치하기 얼마 전, 로마에서 새 감독을 선출할 때 소요가 일어나 137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와 같은 일이 밀라노에서도 벌어질 것인가?
마침 군중이 예배당에 운집하였을 때 밀라노 총독 암브로시우스가 니케아 신조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편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암브로시우스를 감독으로 세우자!” 하고 소리쳤고 군중이 “암브로시우스를 감독으로 세우자!” 하고 일제히 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암브로시우스는 극구 사양했다. 자신이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그가 감독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군중 역시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암브로시우스는 세례를 받고 밀라노의 새 감독이 되었으며 이제는 총독 자격이 아닌 감독 자격으로 아리우스파와 전면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이때 동로마 교회 역시 그들 나름의 문제를 처리하느라 고심하고 있었다.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라는 사람이, 예수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의 정신은 갖고 있지 않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이에 ‘위대한 갑바도기아인’의 한 사람이 “만일 예수가 몸만 인간이고 정신은 신이라면, 어떻게 그런 예수가 나를 도울 수 있을까? 그런 예수는 진정한 인간이 아니다”라고 말했다(히4:15 참조).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 데오도시우스가 이 논쟁을 해결하려고 381년에 회의를 소집했다. 콘스탄티노플에 모인 감독 150명은 니케아 신조를 새로 갱신하여 그들의 믿음을 확고히 표출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신성과 관련하여 니케아 공의회에서 확언한 진리를 확증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이 그 신조를 ‘니케아 신조’라고 불렀다.
암브로시우스의 도전
데오도시우스는 동서로마 제국과 교회를 모두 장악했다. 그러나 밀라노 감독 암브로시우스는 공공연히 황제에게 반항했다. 그리고 일단의 교인들이 유대인 회당을 불태웠을 때, 두 사람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데오도시우스는 회당을 불태운 크리스천들이 회당을 다시 지어주어야 한다고 명령했다. 그러나 암브로시우스는 “건물 하나가 불에 탔다고 이런 소동을 벌이다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곳이 불신앙의 거주지, 하나님을 저주하던 곳임을 모른단 말입니까?” 하고 말하며 황제에게 항의했다.
이에 데오도시우스가 한 걸음 물러나, 그 대신에 교회가 회당을 지을 돈을 헌금하라고 했을 때에도 암브로시우스는 이런 타협안에 수긍하지 않았다. 암브로시우스는 황제가 모든 명령을 철회하지 않으면 주의 만찬에 참석시키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데오도시우스는 이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중에 시민 폭동이 일어나 데오도시우스가 황실 근위대를 풀어 시민 7000명을 학살하자 암브로시우스는 데오도시우스가 주의 만찬에 참석하지 못하게 막았다. 데오도시우스는 깊이 참회한 후에야 비로소 다시 주의 만찬에 참석할 수 있었다.
데오도시우스는 다시 교회에 들어온 뒤 자기가 알고 있는 유일한 수단, 즉 무력을 통해 교회를 후원했다. 이로써 서로마 제국에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더욱 밀접해졌으나 암브로시우스의 대담무쌍한 용기 덕에 교회가 국가에 흡수되지 않고 강력한 힘을 지닌 동반자로 남을 수 있었다.
위 글은 교회신문 <250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