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곤 목사 칼럼] 하나도 실족치 않도록 화목하라
마가복음 강해(25)

등록날짜 [ 2024-03-06 13:30:18 ]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주시어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셨고

주 안의 형제 사이도 화목케 하셔

성도 각자가 예수 피로 구원받은

귀한 핏값임을 알아 서로 화목해야


마가복음 강해(25)

예수께서 가버나움으로 돌아와 제자들에게 길에서 토론한 것에 대해 묻습니다(막9:33). 예수님의 마지막 목적지가 십자가 고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이지만, 예수님과 동행해 온 제자들은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두 번이나 들었는데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 정권을 잡고 왕이 된다”, “자신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리라”라고 기대하며 누가 더 큰지 쟁론한 것이었습니다(막9:34). 


이렇게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두 차례나 듣고서도 엉뚱한 탁상공론을 벌이며 다투는 제자들의 모습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을 이해하고 인내하며 가르쳐 주십니다. 성도 중에도 남·여전도회장, 구역장, 부장, 교사 등 직분 맡은 사람들이 신앙이 미성숙한 지체들을 대할 때 답답하고 당황스러울 때가 있겠지만 예수님처럼 관용과 인내로 잘 가르치며 그들의 신앙을 세워주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명예욕에 사로잡힌 것을 아시고 진정한 영예를 얻고자 한다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교훈하십니다. “아무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9:35). 또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며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막9:36~37)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는 ‘낮은 자’, ‘비천한 자’의 대명사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비롯한 근동 지역에서는 여성과 어린이를 몹시 경시해서 사람을 셀 때도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비천한 자를 섬기고 영접하라”는 윤리적인 당부로 들을 수 있으나, 여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 이름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이름’(마1:21)이므로 예수 이름의 목적대로 그 영혼이 구원받도록 섬기고 영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섬기고 영접해야 할 이유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고 죽어주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혼 구원을 원하는 주님 심정으로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낮아지고 섬기면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큰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의 목적대로 그 사람의 영혼 구원을 위해 섬기고 영접하는 일은 하나님을 섬기고 우대하는 일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입니다. 


또 제자들이 묻습니다.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막9:39~40).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다는 것은 예수 이름의 의미를 알고 믿음으로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한 사람’은 우리의 편이기에 비록 예수님의 무리를 따르지 않더라도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를 믿는 자를 위해 물 한 그릇을 주면 하나님의 상을 받게 되지만(막9:41), 반대로 그를 실족하게 하면 지옥 불의 심판을 면치 못한다고 엄중히 경고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바다에 던지움이 나으리라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막9:42~43). 


예수 믿는 사람을 실족하게 하면 그 사람을 바다에 던져 죽이는 것과 같은 죄이니, 만일 내 손이 남을 실족시키면 차라리 손을 잘라버릴지라도 지옥만큼은 가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또 내 발과 내 눈이 남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그 신체 일부를 잘라 버리고 지옥을 면하라고 반복하십니다(막9:45~47).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려고 십자가에서 고난 받고 죽어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고, 사람과 사이의 죄와 악을 이기게 하셔서 우리도 화목케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사역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믿는 자끼리 서로 섬기지 않고 다투는 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9장 44절과 46절이 ‘없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혹시 그 부분에 손과 발 그리고 눈 외에 남을 실족시킬 수 있는 다른 신체 부위가 생략된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내 어떤 신체 부위를 통해 남을 실족시키는 죄를 지었을까?’ 스스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또 예수께서는 지옥의 무서움에 대해 특별히 구약(사66:24)을 인용하여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 치듯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9:48~49). 마치 불에 소금이 튀듯 지옥 불 속에서 사람들이 영원히 고통당하는 참혹한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만약 지옥의 무서움을 강조하기 위해 생략된 부분에 이 구절을 반복해서 넣는다면 ‘지옥이 이렇게 무섭구나’라고 깨달아 죄짓지 않도록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마지막 50절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은 문맥상 무서운 지옥을 상기시키는 소금을 보면서 예수 믿는 자끼리 서로 실족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화목하라는 뜻입니다. 복음 전도도 무척 중요하지만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할 때 한 사람도 실족하지 않도록 특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난 받고 죽으신 목적을 아는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피의 공로로 거듭난 자들이기에,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핏값’임을 알고 서로 소중히 여기며 예수 안에서 화목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9장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믿음 없음을 보고 탄식하셨습니다. 이 믿음은 예수께서 왜 고난받고 죽고 부활하셨는지를 확실히 아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 갖고 서로 섬기고 영접하여 영혼 구원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83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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