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곤 목사 칼럼] 예수께서 탄식하신 완악함
마가복음 강해(26)

등록날짜 [ 2024-03-07 11:17:56 ]

바리새인이 자기들의 유익한대로

하나님 말씀 이용하는 것 탄식

우리에게 의롭고 선한 말씀 주신

주님의 심정과 뜻을 바로 알아야


마가복음 강해(26)

마가복음 전반부(1~9장)는 예수님의 공생애 약 3년 동안 갈릴리를 중심으로 사역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후반부(10~16장)는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시며 인류 구속 사역을 성취했음을 증거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후반부 시작인 10장은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까지 6개월 정도 베뢰아와 유대 지역에서 사역한 내용을 기록합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가버나움을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강 건너편”(막10:1) ‘베뢰아 지역’으로 가십니다. 예수님은 처절한 고난의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예수님은 복음을 다시 전파하십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는 사람 중에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께 묻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베뢰아는 헤롯 안티파스가 통치하던 지역입니다. 이혼 문제는 바리새인 간에도 의견 대립이 있었고, 헤롯 안티파스의 이혼과 근친결혼을 책망하다가 처형당한 침례 요한의 문제도 있어서 상당히 민감한 사항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물음에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막10:3).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 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막10:4). 바리새인들은 모세 율법에서 ‘수치 되는 일’이라는 말을 빼고 대답했습니다. 신명기 24장 1절에는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결혼한 신부에게 ‘수치 되는 일’이란 결혼 전에 다른 남성과 깊은 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 ‘수치 되는 일’을 모세의 의도와 달리 말도 안 되는 이혼 사유로 확대했습니다. 아내가 요리를 망쳤다든지, 낯모르는 남자와 대화했다든지 온갖 구실을 만들어 아내를 버렸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말씀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말씀을 주신 하나님의 심정이나 의도와 상관없이 자기 유익대로 말씀을 이용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에 탄식하십니다.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막10:5).


모세가 이혼 증서를 허락한 이유는 이혼을 정당화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인 여자를 보호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모세가 율법을 반포하기 전에는 일부다처제가 일반적이었고, 여자를 물건이나 재산 일부로 여겼습니다. 당시 모든 경제권은 남자에게만 있었는데, 결혼 후 아내에게서 ‘수치 되는 일’을 발견한 남편이 여자의 생계를 책임지지 않고 심지어 학대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남편들의 완악함 탓에 차라리 이혼 증서를 써 주어서 여자가 남편에게서 벗어나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은 결혼이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창조의 원리임을 강조하십니다.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몸이 될찌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막10:6~9). 그러므로 바리새인처럼 임의로 아내와 나뉘어 이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가는 것은 본처에게 간음을 행하는 것이고,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막10:11~12). 예수님은 합당한 사유 없이 이혼하고 재혼하는 행위를 간음이라고 보셨습니다. 당시 이혼이 일상화된 바리새인들도 간음에 속한다는 의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혼 증서’를 써 주면 아내를 내어 버려도 된다며 이혼을 정당화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한 실례가 많은데, 그 대표적인 것이 고르반 제도였습니다(막7:11~13). 


하나님이 세우신 법은 그 근본이 다 선합니다. 오늘날 의식과 시각으로 율법을 보면 자칫 오해할 수 있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율법이 주어질 당시 배경을 이해하면 그것이 얼마나 선한 목적을 지녔는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롬7:12)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중에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 있다면 그 말씀의 배경을 이해하려고 힘쓰며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심정과 의도를 찾기 바랍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복된 믿음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위인이나 훌륭한 선생에게 어린아이를 데리고 가서 축복받는 풍습이 있어서 사람들이 어린아이를 예수께 데려와 안수해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3절에 말하는 어린아이들은 예수님이 한쪽 팔로 안을 수 있을 정도로 어린 유아들입니다.


그런데 이를 보고 제자들이 나서서 사람들을 꾸짖습니다. 당시 어린아이들은 사회적으로 미약하고 무가치한 존재였습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데다 어린아이들까지 예수께 데려오니 예수님을 귀찮게 한다고 여겨서 막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행동을 보시고 분히 여기셨습니다(막10:14). 어린아이가 예수님께 나아와 축복받을 기회를 제자들이 방해하기에 분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경우가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막10:14)고 하셨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막10:15)고 하셨습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에게 도움받지 않으면 살 수 없기에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며 부모에게서 절대 떨어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부모의 말씀을 계산하거나 따지지 않고 따릅니다. 우리도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하나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천국과 영생이라는 가치가 세상에 썩어질 것에 휘둘리지 않고 오직 그것만 바라보며 어린아이처럼 천국을 받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83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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