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곤 목사 칼럼] 예수님의 칭찬
마가복음 강해(35)

등록날짜 [ 2024-09-09 00:26:07 ]

외식한 서기관들은 책망받았으나

주님께 자기 모든 것 내어 드리며

공경한 과부의 행동은 칭찬받아


마가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하며 심판받아 마땅한 예루살렘의 실상을 드러내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한 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지만, 이번에는 예수께서 서기관들에게 먼저 질문을 던지십니다. 바로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이라면 다윗이 시편에서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라고 부르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느냐”라는 질문입니다(막12:35~37).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의 약속대로(삼하7:12~16)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렸습니다. 그리스도가 로마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하고 열강 중에 으뜸이 되는 나라로 만들어 주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리가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막11:10)라고 외치며 환호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인용하신 말씀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시110:1)라는 다윗의 고백입니다. 다윗은 성령에 감동되어서 그리스도를 ‘내 주’라고 불렀습니다. 본문을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으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발등상이란 발을 올려놓도록 만들어진 받침대인데, 고대 전투에서 승리한 왕이 패배한 왕의 목을 발로 밟아 버림으로 완전한 승리가 이루어졌음을 나타냅니다. 또 “하나님 우편에 앉으라”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를 지녔다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적으로 뜻합니다. 서기관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후손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실상은 다윗이 주라고 부르는 ‘하나님’이심을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필사하거나 가르치며 구약에 능통하다고 자부한 서기관들은 구약을 통해 그리스도가 다윗의 혈통에서 나실 것은 알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다윗의 주’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습니다. 진짜 알아야 할 그리스도에 대해 무지했던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날 위대한 인물 정도로 여겼습니다. 이것이 서기관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인정할 수 없는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신명기에는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라고 되어 있는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어야 죄가 없으시기에 우리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으므로 다윗의 혈통을 초월한 분이십니다. 다만 다윗의 자손인 요셉과 그와 정혼한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셨기에 다윗의 자손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되 왕의 모습이 아닌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라는 지상 왕국을 건설하실 왕이 아니라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려고 십자가에 죽으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마치신 후 서기관들의 외식을 책망하십니다.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과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막12:38~39). 당시 서기관, 바리새인 등 종교 지도자들은 일반인보다 긴 옷을 입었고 술을 많이 매달았습니다(마23:5). 이는 자신의 율법 지식을 자랑하고 경건함을 표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들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 문안받기 좋아하고, 자신들의 지위를 과시하면서 상석에 앉아 존경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또 이들은 율법적으로 불쌍히 여기며 도와주어야 할 과부의 가산을 오히려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외식하며 길게 기도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에게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라고 경고하십니다(막12:40).


과부의 두 렙돈 예물

예수께서 연보궤에 대하여 앉으사 무리들이 연보하는 광경을 지켜보셨습니다(막12:41). 연보궤는 예물을 넣는 함이며, 예수님 당시 연보궤에는 동전 넣는 구멍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은 일부러 동전을 많이 바꾸어 연보궤에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리도록 해서 자신을 과시했습니다.


그때 마침 부자들이 요란한 동전 소리를 내면서 연보궤에 예물을 드렸고, 뒤이어 한 과부가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로마 동전의 명칭)를 넣었습니다. 렙돈은 당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가장 작은 액수의 동전인데, 겨우 한 끼 먹을 수 있는 액수를 드린 것입니다.


주님은 부자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셨고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12:43~44). 왜냐하면 그 과부는 그날 자기가 먹고살 생활비 전부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자기 소유 중 일부만 드렸고, 이 가난한 과부는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친 것입니다.


본문에서 서기관들은 주님께 책망과 심판의 경고를 들었지만, 가난한 과부는 칭찬받았습니다. 서기관들이 외식과 교만한 마음을 품은 반면, 가난한 과부는 하나님에 대해 진실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열매는 과부처럼 진실하게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또 서기관들처럼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과부처럼 행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알았고, 또 잘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여 오해하고,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도 똑같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얼마나 성경을 많이 오해합니까?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얼마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과부처럼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내어 드리며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을 진실하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원한 지옥 형벌에서 죄 사함받고 구원받은 것에 감사하며 진심으로 하나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 드릴 수 있는 열매가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마가복음 강해(35)

위 글은 교회신문 <865호> 기사입니다.


    아이디 로그인

    아이디 회원가입을 하시겠습니까?
    회원가입 바로가기

    아이디/비번 찾기

    소셜 로그인

    연세광장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