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칼럼] ‘무익한(?) 사랑’의 힘

등록날짜 [ 2010-03-17 09:30:07 ]

조건 없는 예수의 가르침 본받아
자신을 내어주는 ‘진리’ 실천해야

이전에 어떤 고약한(?)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려운 살림에 홀로 아들을 키우며 헌신했던 늙은 어머니는 귀한 아들을 군대에 보내게 되었다. 군대에 간 아들에게 기도밖에는 딱히 해줄 것이 없었던 어머니는 급기야 아들과 함께 고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군 복무 기간이 3년이었던 그 옛날에, 어머니는 아들이 군대에 있는 세 번의 겨울을 늘 냉방에서 지냈다. 아들이 고생하는데 자신만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없다는 이해할 수 없는 고집이 아들을 무척이나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어머니의 얼음장 같은 구들이 아들에게 무엇을 더해줄 수 있었겠는가. 3년에 걸친 실랑이가 끝나도 오랫동안 아들의 마음속에 어머니의 찬 겨울은 이해되지 않았다.

차라리 돈을 보내주면 배라도 채울 수 있을 것이고, 따뜻한 방에서 주무시면 아들의 마음이라도 편할 것이라고 투덜대며 어머니의 고약한 사랑을 이해할 수 없었던 아들은, 어머니의 무익한 사랑이 자신의 삶의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는 것을 아주 늦게서야 깨달았다.

어머니의 사랑은 아들에게 아무것도 손에 쥐어 주지 않았다. 손에 잡히지 않는 것,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는 것, 그런 것을 사랑이라고 부르면, 그 순간 그 사랑은 이미 힘을 잃는다. 그런 쓸모없고 보잘것없는 사랑은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것은 짐스럽고 아무 보탬도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이런 무익한 사랑을 생각하다 보면, 예수님의 죽음이 어느새 마음속에 자리를 잡는다.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 또한 그러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죽는다는 것은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그 많은 능력을 그렇게 흘려보낸다는 것은 얼마나 낭비인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적들을 무찔렀으면어떠했을까? 검으로 악한 무리를 무찔렀으면 어떠했을까? 화려한 온갖 능력들을 원 없이 사용했다면 덜 허무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하지 않았다. 그리하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죽음의 길을 택한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을 주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우리의 손에 들어 있는 것마저 빼앗는다. 우리에게도 그와 같은 죽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음으로 가는 예수님의 길은, 부활을 위한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세상의 방법과 다른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자신의 이익과 배치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주라는 진리의 핵심이다.

무엇을 바라고, 계산하고, 재어보고 하는 희생이 아니라, 그냥 자신의 삶을 더 큰 것을 위해서 내어주는 것이다.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죽음밖에 없는 ‘무익한 사랑’은, 사순절 기간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삶의 새로운 방식이다.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사랑으로, 세상이 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준 ‘그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 그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18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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