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성진 목사의 선교史<4>] 아일랜드의 위대한 ‘노예 선교사’

등록날짜 [ 2010-06-28 23:31:17 ]

노예로 잡혀갔던 땅에 최소 200 교회 설립과 10만 명 이상 개종

<글 싣는 순서>

4. 아일랜드의 패트릭 - 다시 죽음의 땅으로
5. 암흑의 시대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콜룸바
6. 로마 가톨릭의 선교와 수도원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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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세기 당시 선교 상황
서기 2~5세기 세계선교는 로마 제국의 잔인한 핍박으로 수많은 순교자의 피 흘림과 이단과의 영적 싸움이라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였고, 여러 복음 전도자들이 로마 영역인 북아프리카와 서바나(현재 스페인), 갈리아(현재 프랑스)를 넘어 브리튼(현재 영국)까지 가서 전도하는 일들을 급속히 진행했다.

이 시기에 활동한 대표적 선교사로는 다뉴브 강 북부 고트족을 대상으로 성경을 번역하여 복음을 전한 울필라스(311~380년), 그리고 비교적 늦게 복음화 한 아일랜드에서 활동한 패트릭(389~461년)을 들 수 있다. 그 중 패트릭의 선교사역을 소개하고자 한다.

노예생활을 한 곳에서 전도하라
패트릭은 당시 로마령인 브리튼의 기독교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거듭난 체험이 없는 형식적 신앙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10대 중반에 그가 사는 마을에 침입한 해적들에 의해 뜻밖에도 아일랜드에 노예로 잡혀간다. 패트릭은 노예 생활의 고난 중에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적인 구주로 믿으면서 기도생활을 시작하고 영적으로 깊은 경지에 들어가 수시로 성령님의 응답과 인도하심을 경험하였다.

힘겨운 노예 생활이 6년쯤 지날 무렵, 패트릭은 어렵게 항구로 도망쳐서 배로 아일랜드를 탈출하고 프랑스까지 도주하여 레린스(Lerins) 수도원에서 머물면서 영적인 평안을 취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패트릭은 수도원 생활 당시부터 자신을 향한 특별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한다.

그것은 환상 가운데 아일랜드 사람들로부터 “믿는 자여! 우리에게 와서 우리와 다시 한 번 같이 지내자”라는 음성이 계속해서 들리는 것이었다. 끔찍한 노예 생활을 하던 곳에서 요청한 참으로 잔인한 소명이었기에 패트릭은 쉽사리 아일랜드로 가지 못했다. 또 한편으로는 불신앙의 암흑에 빠져 있는 아일랜드 사람들에 대한 부담을 가진 채, ‘고올’ 지방의 오세르 교회로 가서 수학하고 성직자로 살아가기로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교 사명을 결코 거부할 수 없었기에, 패트릭은 40세가 되자 다른 이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노예 생활의 아픔이 생생한 아일랜드로 다시 갈 것을 결심한다. 이처럼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포로가 되었던 땅으로 다시 부르시는 소명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432년 패트릭이 아일랜드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각종 미신과 드루이드교(Druid, 자연 숭배와 주술적 신앙의 종교)의 영향으로 선교를 진행하기에 큰 어려움에 직면한다.

깊은 신앙 체험과 선교에 대한 열정을 가진 패트릭은 드루이드교의 마술적 종교의식과 강력한 저항 속에서도 상대방을 야만적으로 취급하기보다는, 아일랜드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며, 몇몇 드루이드교 추장들을 복음으로 설득하여 기독교로 개종하게 하는 열매를 거둔다. 이후 패트릭은 아일랜드 로이개어 왕으로부터 선교 활동을 허가받고, 왕의 동생인 영주를 개종해 그에게서 대지를 하사받아 그곳에 교회를 건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어렵게 교회를 건축한 이후에도 패트릭의 소망은 예수 이름이 한 번도 전파되지 않은 지역들로 더 깊숙이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고, 그의 소망대로 30년간을 아일랜드 전역을 누비며 복음전파하는 일을 위해 쓰임받는다. 이 선교 여정 가운데 패트릭은 납치를 포함하여 열두 번이나 드루이드교 추장들과 무장군인들, 강도들에게서 죽을 위험을 당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하나님이 부여한 복음전도의 명령으로 말미암아 선교의 사명을 절대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패트릭의 선교 열매는 아일랜드 전역에 최소 200개 이상 교회를 세우고, 10만여 명을 개종하는 일과 지역마다 많은 사람을 복음의 리더로 세우는 일로 잘 나타난다.

아일랜드 역사상 위대한 선교사
자신에게 고통을 안긴 땅으로 선교를 출발하는 것과 이방 종교의 강력한 저항을 뚫고 교회를 세우고 후배들을 세우는 너무나 대단한 사역을 담당한 선교사이기에 많은 사람은 그를 아일랜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로 지칭한다. 그러나 그는 늘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며 모든 사역에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부족함을 채우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였다고 말한다.

“나 패트릭은 수양이 부족하며, 모든 신도 중 믿음이 가장 약하고 많은 사람에게 손가락질 받아 마땅하다.”

이것은 그가 말년에 썼다는 ‘고백론’의 첫 구절이다. 그는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일 따름이며, 그가 죽음을 앞두고 고백하고 싶은 것도 하나님의 역사뿐이라고 기록했다.

겸손한 사람 그리고 자신이 이룬 것을 누리려 하지 않았던 사람, 오늘날 선교사를 포함한 하나님의 일꾼들이 배워야 할 사람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19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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