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땅을 가다 ⑤] 사도 바울의 출생지, 다소
소아시아 지역 학문과 군사의 중심지

등록날짜 [ 2009-11-17 15:43:56 ]

다소는 이스탄불에서 남쪽으로 약 900Km지점의 지중해 해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당시는 항구도시였으나 지금은 지중해에서 15Km의 내륙에 위치한 도시이다.
다소는 기독교의 역사에 가장 위대한 도시이다. 다소는 기독교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인 사도 바울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다. 사도 바울의 출생연대는 분명치 않으나 예수께서 탄생하신 몇 년 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주후 67년에 로마에서 순교했다. 신약성경에 예수님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27권 가운데 거의절반에 해당하는 13권이 사도 바울에게 관련되어 기록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세 번에 걸친 전도여행을 통해 험한 산을 넘고 태산 같은 파도를 헤치며 때로는 감옥에 갇히면서 전도자의 사명과 사도로서 감옥에 갇히면서 전도자의 사명과 사도로서의 길을 충성스럽게 걸었다. 신체적 불치의 병을 지니고 세계 복음화를 위하여 국경과 인종을 초월하여 이방인에게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그의 높은 학식이 더욱 빛을 발하여 기독교의 기초를 굳히는데 크게 공헌했다. 기독교의 신학은 그에 의해서 틀이 잡혔으며 후세에 끼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위대한 사도 바울의 고향 땅을 밟은다는 것은 어느 성지 못지 않게 의미가 있다.
바울은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의 시민이다.”(행21:39)라고 말하고 있다. 소읍이 아닌 도시의 다소가 결코 평범한 도시가 아니며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 도시임을 암시하고 있다. 도시 규모는 지금은 인구가 약 8만인데 그 당시는 약 50만의 인구를 자랑하는 도시로 지중해 지역의 어느 도시도 다소보다는 크지 않았다.
다소는 로마시대에는 길리기아 지역의 정치적 수도요 소아시아의 학문과 문화 그리고 군사적 중심지였다. 다소는 그 고장 사람들이 일반 학문을 공부하는 데 있어서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를 능가하는 대학도시였다. 또한 지중해의 분주히 움직이고 떠들썩한 상업 도시이자 항구도시였다.
천연적으로 보호받은 항구로 키두누스강이 지중해로 흐르고 북쪽은 타우러스산을 포함하여 산맥으로 둘러있다. 또한 풍부한 광물자원과 목재는 무역에 대한 좋은 조건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다소의 특산물은 원자재의 아마(亞麻)와 염소털로 된 직물이 유명하여 직조업과 천막제조업이 성행했다. 당시의 천막제조업은 바울을 통해 오늘날 까지 유명하게 전해지고 있다.(행18:3) 도시입구에서 바울이 태어나 생가를 향하여 들어가다 보면 도로변에 유적의 성문이 세워져 있다. 이 성문의 모습은 보잘 것 없지만 유명한 클레오파트라 문이다. 주전 41년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지중해를 배를 타고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의 안토니우스 장군을 찾아 온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유혹하여 자신의 보호자로 삼았으나 암살당하자 안토니우스 장군에게 접근하기 위하여 다소까지 찾아왔다. 다소에서 이 두 사람의 만남은 그후의 역사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다소에 세워진 클레오파트라 문은 그녀의 다소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다. 이 클레오파트라 문을 지나서 얼마쯤 걸어 들어가면 성 바울의 우물(Saint PaulusWell)이라는 표지 간판이 붙어 있고 그 안에 들어가면 우물이 있다. 바로 이곳이 사도 바울이 태어난 생가라고 전해지고 있다. 바울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이곳의 우물물을 마시고 자랐으며 위대한 인물이 배출된 곳이라는 사실을 현지에서 실감할 때 마음이 뭉클했다.
다소를 방문하고자 하면 항공편으로 다소에서 약 40km 위치에 있는 아다나 비행장을 이용하던가 육로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다소에서 육로로 안디옥(Antioch, 현-Antaykya)까지는 약 3시간, 안달리아(Antalya)까지는 약 10시간이 소요된다.

위 글은 교회신문 <17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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