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의 땅을 가다(9)-사도 바울 3차 전도여행지, 서머나
터키 3대 도시 중 하나, 폴리갑의 순교지로 유명

등록날짜 [ 2010-02-08 14:06:36 ]


터만 남아 있는 터키 서머나교회(좌), 폴리갑 기념교회 내부모습(우).

서머나는 고대에 ‘스미르나’라고 부르다가 그리스의 식민지가 되면서 ‘서머나’로 불렀고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만 터키제국이 멸망하고 터키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이즈미르’라고 부르고 있다. 서머나는 주전 3000년경부터 에게 해안의 항구도시였다. 지금은 이스탄불에서 남서쪽 약 336km에 위치해 있으며 이스탄불, 앙카라 다음으로 터키의 3대 도시 중 하나이다.
서머나는 주전 330년대 소아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더가 파고스 언덕에 거대한 성채를 쌓고 산 밑 해안지역에 그리스식 대도시인 서머나를 건설했다. 그 후 주전 20년대에 로마제국에 의해 더욱 발전했다. 서머나는 소아시아 제일의 도시 메트로폴리스라는 칭호를 에베소, 버가모와 더불어 다투던 도시였다. 서머나는 파고스 언덕의 찬란한 건물들이 바다를 향하여 경사져 있어 풍광이 수려하고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미풍은 사철 신선하고 시원한 기후를 유지하며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로 무역이 성행했다.
그러나 서머나는 주후 170년대에 대지진으로 크게 파괴된 후 여러 번 지진으로 서머나의 영광은 사라지고 땅속에 묻혀 버렸다. 1930대 이후 고고학자들의 발굴 작업이 계속되었다. 그 유적으로 2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 원형극장을 비롯하여 운동 경기장, 로마식 공동 목욕탕, 대규모 아고라 등을 볼 수 있다.
초대 교회인 서머나교회는 사도바울의 3차 전도 여행 시 그에 의해 세워졌다는 주장이 유력하다. 폴리갑은 서머나교회의 감독으로 오래 있었다. 폴리갑은 기독교의 핍박이 심할 때마다 로마 총독에게 끌려갔다. 황제를 주(主)라고 고백하도록 강요당했다. 그러나 단호히 거부했다. 야외경기장에 끌려가서 많은 군중이 모여 있는 가운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리스도를 비난하고 모른다고 하라. 그러면 내가 너를 놓아주리라” 했다. 그러나 폴리갑은 대답하기를 “내가 86년간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믿어 왔는데 그분은 나에게 아무 피해도 주지 않았으며 하물며 나의 주인이시며, 왕이요, 구세주이신 그분을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그들의 집요한 강요를 끝까지 거부했다. 죽기까지 충성한 이 존경할 만한 폴리갑은 주후 155년 빌라델비아의 성도 11명과 함께 불에 타 순교했다.
요한계시록에 서머나교회는 빌라델비아교회와 더불어 책망이 없던 교회였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계2:10~11). 폴리갑은 죽도록 충성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소유한 자랑스러운 순교자로 후손들의 본이 되고 있다.
폴리갑 기념교회는 17세기에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 교회는 1960년에 다시 세워진 것이다. 이 교회는 가톨릭에 속해 있는데 교회 내부에는 가톨릭의 성화와 폴리갑의 생애에 관련된 성화들이 벽을 채우고 있어 화려함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아픈 마음을 억제치 못하게 한다.
특히 폴리갑의 순교 장면을 그린 성화는 지난날 우리의 신사참배했던 믿음의 선진들과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서머나를 순례하고자 하면 이스탄불 공항에서 비행기 편으로 1시간도 채 안 걸리지만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7대 교회를 전부 순례할 경우 육로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고영대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17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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