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한국침례회 약사(略史)] 한반도에 침례교 뿌리가 확고해지기까지

등록날짜 [ 2010-09-28 21:06:15 ]

침례교의 시작(1889년~1920년)


한국 최초 침례교회(강경침례교회)

한국 침례교회 역사는 1889년 말엽에 서울에 도착한 캐나다 독립 선교사인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의 선교사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한국에 온 후 펜윅은 서울에서 약 10개월간 한국어를 공부하다 황해도 소래로 갔다. 소래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선교 사업에 착수한 펜윅은 1893년 다시 캐나다로 귀국하여 3년간 체류하였다.

펜윅 선교사는 1896년 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3년간 캐나다에 체류하는 동안 목사안수를 받고 침례교 신앙노선으로 변화되어 돌아왔다. 그는 귀국하자 소래를 떠나 다른 교파 선교회의 손이 닿지 않은 원산에 정착하여 선교 사업에 착수했다. 그는 집에서 순수 성경 공부반을 만들어 동역할 사역자를 육성하여 기거를 같이했다. 1901년 충남에 있는 엘라 씽 기념선교회 사업을 인수받아 자신이 하던 한국순회선교회와 병합하였다

1914년 펜윅은 제9회 대화회(총회)를 원산에서 개최하고 9년간 역임하던 감목직을 이종덕 목사에게 위임함으로써 제2대 감목을 선임하였다.

1809년 장로교와 감리교가 선교지 분할협정을 맺은 ‘교계예양’ 협정에 따라 한반도 선교지를 분할하자, 펜윅은 기왕에 다른 교단의 손이 미치지 않은 개척선교에 목표를 두고 선교 터전을 만주, 간도, 시베리아, 몽골 지역에 두고 일했다.

동아기독교회 시대(1921~1949년)
1921년 제16회 대화회가 경북 광천에서 개최되었을 때 교단 명칭은 동아기독교회로 변경되었다. 1945년, 광복으로 일제는 물러났으나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하였기 때문에 만주, 러시아 및 북한 지역에 교단 주류세력을 지녔던 동아기독교는 또다시 남한을 제외한 교회들을 상실하는 비운을 맞았다.

1946년 2월 충남 칠산에서 교단 지도자들이 모여 교단재건회의를 소집했으며 9월 9일 노재천 대리감목이 강경교회에서 36회 대화회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 교단 체제를 시대 흐름에 따라 바꾸어 감목제를 회중제로, 대화회를 총회로 바꾸었다. 또 교단 위계 직분도 감목을 총회장으로, 안사를 목사로, 감로를 장로로, 통장을 권사로, 총장과 반장을 집사로 바꾸고 교사는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1947년 경북 예천지역을 중심으로 한 10여 개 교회가 36차 대화회에서 교단체제 변경에 반발하면서 동아기독교에서 탈퇴하여 ‘대한기독교’를 조직하여 분립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총회분열 시대(1959~1968년)
1960년대 한국침례교단은 발전을 위한 과도기적 시련을 거쳐야 했다. 1950년대 선교사들과 그들의 선교정책은 당시 한국적 풍토나 체질에는 그대로 수용할 수 없는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선교의 외세(선교사)를 둘러싼 한국지도자들의 불목과 경쟁, 그리고 이러한 와중에 정치적 변수로 작용한 타 교단에서 전입한 교역자들의 제3세력 구축 등 문제는 더욱 복잡성을 띠게 되어 총회와 선교회의 협동문제가 마침내 결렬됨으로써 한국침례회총회는 9년간 교단분열의 역사를 거치게 되었다.

9년간의 교단분열은 이전에 배타했던 제반 비침례교적 요소들을 여과하는 반성과 경험의 교훈을 주었다. 선교부의 재정적 보조에 의존하던 교회와 교역자들에게 신앙과 영력을 통하여 교회발전을 지향하는 좋은 믿음과 계기를 촉진하였다. 정치와 물질과 권력 다툼으로 갈라진 총회와 교회들이 말씀을 통하여 교회와 교단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비전과 확신으로 하나가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분열의 역사는 지난날을 반성하게 하고 형제간 이해와 사랑을 나누는 체험을 주었다.

기독교한국침례회(1968년~현재)
1960년대에 교단 안에 일기 시작한 영적 부흥운동이 재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나약한 침례교회들과 교역자에게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신감을 불러일으켜 양적 증가와 교회성장 기틀을 마련하였다면, 1970년대에는 교회와 교역자 훈련 캠페인을 통해 침례교회 신앙정립과 건전한 교회생활 기틀을 다짐으로써 침례교단이 건전한 신앙을 정립하고 교세를 확장하는 획기적인 시기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1960년대 영적 부흥운동, 1968년 교단통합, 그 이후 전국적인 훈련 캠페인, 그리고 참신한 젊은 사역자들의 계속적인 등장은 1970년대 침례교단 발전과 번영을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교단 통합과 더불어 전개한 1970년대 한국침례회연맹 총회 시기는 이처럼 한국사회에서 침례교회가 성장 발전할 여러 가지 기틀을 다지는 데 심혈을 쏟은 시기였다. 1976년 11월 4일부터 교단 명칭을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변경하였다.

이제 침례교회는 한국 땅에서 기틀이 완전히 다져졌다. 그리고 아직은 더욱 신약 성서적인 교회생활과 신앙정신을 구현하는 교회를 향하여 그들의 신앙과 행습, 교회행정과 조직, 교단 정치와 사업은 계속해서 기틀을 다지고 있다. 1980년대 위대한 침례교회 성장은 바로 1970년대 이러한 교단생활의 기틀에서 시작한 것이다.

1989년, 침례교단은 선교 100주년 대회를 서울 올림픽주경기장에서 개최했으며, 1990년 같은 장소에서 제16차 침례교 세계대회를 성공리에 개최함으로 한국 침례교단을 세계에 알렸다. 1999년 침례교 110주년 대회를 거쳐 올해 2010년에는 기독교한국침례회 100차 총회를 연세중앙교회에서 개최하기에 이른다.

위 글은 교회신문 <21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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