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용어 알파와 오메가·39] 양심(養心)과 양선(養善)

등록날짜 [ 2018-12-20 21:22:08 ]


우리는 하나님 형상의 모양으로 지음받고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생기를 받아 생령(生靈) 곧 영적 존재가 됐다. 살인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중한 죄가 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형상대로’ 지어져서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9:6). 


 우리가 비록 죄 때문에 영이 혼탁해졌어도 영적 특성은 남아 있다. 첫째, 사람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막연하게나마 하나님을 찾는다.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하되”(미4:5). 또 하나의 극명한 특성은 ‘양심’이다. 선악과 사건 이후로 하나님과 단절되고 영에는 죗값으로 사망이 왔어도 영적 존재인 인간은 성별, 나이, 국적, 인종, 교육, 문화 등 무수한 차이에도 ‘양심’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녀서 남을 괴롭히거나 옳지 못한 행동에 가책을 느낀다.  행악이 습관화하거나, 죄를 정당화하는 학습으로 양심의 감각이 무뎌질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영이 소멸되지 못하듯 양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2:14~15).


그래서 ‘양심’의 성경 원문 συνε?δησι?(쉬네이데시스, conscience)는 ‘공통으로(con) 가진 지식(scientia)’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받은 한 영, 아담에서 갈라져 나왔기에(말2:15), 공통적으로 ‘악함’을 인지한다. 하나님을 모를 때도 양심이 증거가 돼 복음을 듣고 회개할 수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엇이 정의(justice)요, 선(goodness;양선)인지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성령을 떠나면 각자 자기 기준으로 해석한다. 만일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엄청난 매출을 올린 ‘마이클 센델’이 뭔가 속 시원하고 명료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을까 기대한다면, 시원함에 대한 기대가 모호함으로 대체되는 불편 속에서 ‘공리주의 정치철학’이라는 또 하나의 잣대만 늘어나게 될 것이다. 


진정한 선함은 우리 양심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피 뿌림을 얻고 성령의 지배 가운데 들어가야만 얻어진다.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롬9:1). 침례 또한 양심을 씻고 하나님께 나아감의 고백이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3:21).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양심이 날로 더욱 정결해지면, 과거에 내가 모범생이고 칭찬받던 일에서도 죄를 발견한다. ‘그때 나는 왜 나와 비교되던 내 동생, 친구의 고통을 무시하고 우월감을 즐겼던가?’ 하다못해 엉터리 주차로 이웃을 힘들게 한 일도 회개하는 ‘착한 양심’을 가지는 것이 양선(養善)과 정의(正義)의 시작이다. 


성경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딤전1:19)고 명령한다. 어떤 이는 선한 양심의 사랑으로 형제의 잘못을 ‘권면’하고, 어떤 이는 마귀 닮아 참소의 즐거움에 이끌려 ‘지적’하고 ‘비판’한다. 그러나 성령님과 내 양심은 그것이 ‘양선’인지 ‘행악’인지 알고 있다. 


양심이 성령 안에서 증거되지 않으면 입을 다물고 혀를 절제하는 것이 ‘양선’의 시작이다.


위 글은 교회신문 <60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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