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13)] 예루살렘 성전산을 둘러싼 성경적 의미
예수 그리스도 구원 사역의 뜻과 섭리를 알 수 있는 곳

등록날짜 [ 2015-09-29 23:33:32 ]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예루살렘’ 하면 ‘예수님’과 ‘복음증거’가 생각납니다. 예루살렘은 지금도 이삭과 이스마엘의 후예가 끝없이 유혈 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인류 구원 사역을 완성하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 예루살렘 현장으로 가 보시겠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기원전 1000년경 다윗왕이 수도로 정했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옮겨 온 후, 유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성지(聖地)가 되었다. 예수님 당시 왕인 헤롯대왕은 예루살렘 성을 재보수하여 유대인의 환심을 샀다. 헤롯은 당시 지중해 연안에서 하나님의 성전을 가장 아름답게 보수해 도시를 재건했다.

 

성전과 예루살렘 건물들은 주변 석회암을 다듬어 석재로 사용했고 그 석회암이 햇빛에 반사되는 흰빛으로 말미암아 당시 예루살렘 성의 위엄은 더욱 돋보였다. 예루살렘은 유대인·기독교인·회교도 모두에게 최고의 성지인 까닭에 이곳을 차지하고자 하는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

 

헤롯 왕 당시 예루살렘 성.


 

윤석전 목사: ‘예루살렘’ 하면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그곳은 지역 특성이 많은데요, 예루살렘을 자세히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예루살렘에 가면 ‘정도(定都) 3000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수도가 된 지 3000년이 됐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역사의 큰 흐름이 느껴지는 현장이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또 성서 지리적으로도 중요합니다. ‘사건’은 사람과 시간과 장소가 유기적으로 결합해 이루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와 사건들이 예루살렘이라는 아주 좁은 지역에서 지금까지 일어났고,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점에서 예루살렘을 참 좋아합니다.

 

예루살렘에는 내가 걷는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엄청난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새로운 역사적 증거들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또 예루살렘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곳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선택해 역사하시지만, 장소를 택해서 역사하시기도 하니까요.

 

이제 본격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올드시티(Old City)로 가 보겠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포함한 이 지역은 총면적 1km²에 불과한 좁은 지역입니다. 한 변의 길이가 1km쯤 되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올드시티 바로 오른쪽에는 기드론 계곡이 있고 그 옆에 겟세마네 동산을 비롯해 예수님과 관련된 수많은 유적지가 몰려 있습니다. 올드시티 왼쪽과 아래쪽에는 힌놈 골짜기가 있습니다.

 

또 많은 분이 ‘예루살렘’ 하면 ‘황금돔 사원’과 ‘통곡의 벽’을 떠올립니다. 통곡의 벽은 사실 올드시티 내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 서쪽 벽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통곡했다고 해서 ‘통곡의 벽’이라는 이름 붙었지 원래는 ‘서쪽벽’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중요한 유적 중 하나가 바로 올드시티 남쪽에 있는 다윗성 자리입니다. 성지순례객들이 대개 ‘통곡의 벽’만 찾는데, 다윗성에도 꼭 가 봐야 합니다. 또 예루살렘은 지대가 높아 물이 없는데, 물이 나오는 아주 특이한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기혼 샘입니다. 기드론 계곡에 있는데, 전혀 물이 나올 것 같지 않은 곳에서 물이 솟구쳐 오르는 아주 특이한 곳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저수지이지 물이 나오는 곳은 아닙니다. 올드시티 남쪽에는 히스기야가 앗수르의 침략에 대비하려고 533m(직선거리 320m) 길이로 뚫어서 이 기혼 샘에서 나온 물이 흐르게 한 터널이 있습니다. 히스기야 터널의 끝 부분에 가면 예수님께서 이적을 베푸신 실로암 연못이 나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올드시티’는 밟는 모든 곳이 성지라고 할 정도로 아주 중요합니다.

 

윤석전 목사: 예루살렘은 성서적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숨 쉬고, 살아있고,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은 신학적 의미도 클뿐더러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지역적 의미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지역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조경철 교수(감리교 신학대학교 신약학): 예루살렘의 신학적 의미는 다윗왕과 솔로몬이 세운 성전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께서 광야생활 동안에는 성막 지성소에 거주하셨고,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성전을 세운 후에는 성전 안에 계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무척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일 년에 세 번 정도 반드시 순례해야 했습니다. 순례할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은 예루살렘을 향해 늘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은 예루살렘을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믿었기에 그곳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이 거주하는 도성’ 예루살렘을 우리는 ‘시온산’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의 역사적, 신학적 의미입니다.

 

기독교인에게 예루살렘은,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을 상징하는 도시로서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기독교에서는 예루살렘이라는 도시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은 예수님이라고 하는 인격 속에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믿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믿습니다.

 

예루살렘의 신학적 의미는 다윗왕에서 솔로몬 성전으로 이어지는 구원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에게는 ‘예루살렘’의 지리적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인격이 더 중요합니다. 이것을 놓친 채 단순히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의 중요성만 강조하면 십자군 운동과 같은 우를 다시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은 성지순례를 하면서 명심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석전 목사: 예루살렘은 구약 때부터 화려했고 왕이 살았습니다. 또 선지자의 활동도 많았던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 생애를 완성하실 때도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최후를 맞으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경철 교수: 그 부분도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도성’이라는 측면과 연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기독교인에게 예루살렘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으셨다면 오늘 우리에게 예루살렘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다른 곳이 아닌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을까?’ 하는 점이 신학적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한 일이기에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계신 도성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약성서와 연관해 생각해 보면, 유대인들은 유월절 축제(하나님이 출애굽 전야에 이집트 땅을 치실 때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것들을 구원해 준 일을 기념하는 절기)를 지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오기 전, 하나님이 내린 재앙으로 애굽의 장자가 모두 죽었지만, 문설주에 피를 바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살았습니다.

 

유월절을 기념하는 축제는 이스라엘 민족의 믿음대로라면 다른 곳에서는 행해질 수 없고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거행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의무적으로 유월절 축제를 지내려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고,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이므로 그곳에서부터 하나님의 통치가 전 인류를 향하여 확산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종말이 되면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모든 족속을 시온산으로 부를 것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사18:7). 이 말씀과 연관해 생각해 보면, 인류 구원 사역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일어나야 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하나님의 섭리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시작하고 마감하며, 예수의 복음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증거되는 섭리를 잘 알았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면서 오르신 성전산을 살펴보겠습니다.

 

 

성전산(감람산)에서 겟세마네로 내려오는 길 중간 지점에 눈물교회가 있다. 이곳은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다’는 뜻인 ‘도미누스 플레비트(Dominus Flevit)’란 이름으로 부른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예루살렘의 미래를 안타까워하시며 우신 사건을 기념하여 세웠다. 예수님은 여리고를 거쳐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성전산 벳바게에서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오셨다. 이는 메시아의 예루살렘 입성을 예언한 구약 말씀을 성취한 사건이다. 그때 군중은 겉옷과 종려나무가지를 길에 깔며 예수님을 환영했다.

 

예수께서는 성전 뜰에 들어가셔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시면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로 만드는도다”(마21:13)라고 꾸짖으셨다. 또 병든 자들을 치료하셨고 말씀을 가르치셨다. 그 후, 성전산 언덕에 오르셔서 멀리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크게 우셨다. 장차 유대민족이 당할 비참한 멸망을 미리 아셨기에 크게 애통하실 수밖에 없었으리라.

 

성전산 눈물교회.


 

윤석전 목사: 성전산에 가면 느끼는 게 많습니다. 성전산이 얼마나 중요한지 지리적으로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홍순화 원장: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고 현재는 그 자리만 남아 있기에 ‘성전’이 아니라 ‘성전산’이라고 합니다. 성전산의 근원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한 모리아산이라고 합니다(창22장). 그 후 다윗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아들 솔로몬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는데 그 성전 자리가 바로 성전산입니다. 솔로몬 성전은 주전 586년경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고, 50년 뒤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이 이곳에 스룹바벨 성전(제2의 성전)을 재건했습니다.

 

그 후 주전 19년, 헤롯왕이 또다시 성전을 지었고, 주후 70년, 로마에 의해 완전히 파괴당했습니다. 그 후 이슬람이 이 지역을 정복하여 회교 사원을 지었고 691년에 그들의 성지로 만들었습니다. 이곳에 성지를 세우고 싶어 하는 이스라엘 사람과 회교 사원을 뺏기고 싶지 않은 이슬람교의 갈등이 여기에서 시작됐습니다.

 

윤석전 목사: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성전산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며 한없이 슬피 우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고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마23:37) 하시던 현장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아파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경철 교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슬피 우셨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예루살렘은 유대인에게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화려한 성전, 멋있는 예루살렘 도성, 여기에 하나님이 계실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화려한 성전에 계시지 않고, 보잘것없는 갈릴리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 모습을 본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 그곳에 구원이 이루어지고 인류 평화가 이루어졌을 텐데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왜 거부했을까요? 화려한 성전, 즉 요즘 말로 하면 굉장한 경제적 부강과 군사적 힘을 가진 하나님을 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모습으로 온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잡아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안타까운 모습을 보시고 우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예루살렘, 하나님이 없는 예루살렘은 그저 하나의 건물이 있는 도시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예루살렘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니라”(마24:2;막13:2;눅21:6)는 말씀처럼 결국 예루살렘은 주후 70년 로마군에 의해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멸망했습니다.

 

성지순례 할 때 생각해야 할 점은, 우리 가슴에 예수님이 없다면 어디를 가더라도 성지순례가 아니라 ‘여행’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지 여행만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지금도 울고 계실지 모릅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품고 성지순례 해야지 예수님이 받아주십니다. 예수님 없이 가는 여행은 그 당시 예루살렘과 비슷한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우리 가슴에 주님을 모시지 못하면서도 주님을 모신 것처럼 살지는 않는지,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도 내 속에 믿음을 진정으로 가지고 있는지 한번 살펴봅니다. 만약에 내 안에 예수가 없는데도 예수가 있다고 오해한다면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서 탄식하시며 슬퍼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주님이 우리 때문에 탄식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평생에 예수 그리스도를 잘 모시고 그분을 섬기며, 주님의 소원인 복음 전도를 열심히 하면서 예수님 생애의 위대한 증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5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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