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말씀] 성탄의 어린양 예수

등록날짜 [ 2015-12-22 20:20:54 ]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셨으니
모든 세상 죄를 지고 이 땅에 오신 구세주를 경배해야



요한복음 1장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멸망하는 인류를 방관하지 않으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지금까지 또 앞으로 영원 후까지도 영원히 사시는 것은 죄가 없는 거룩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탄’은 감당할 수 없는 축복
하나님은 영이시나 인류 구원을 위하여 말씀이 되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거룩한 분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여자를 통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이사야서에도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고 했습니다.

‘임마누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는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성탄하신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심을 확인하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는 죄가 없는 거룩한 의인이십니다. 그런 거룩한 분이 인간의 죄와 저주와 질병과 죽음을 담당하시려고, 인간의 구원을 전제로 고의적으로 세상에 오셨으니, 죄 없으신 그가 육체로 오신 것이 바로 ‘성탄(聖誕)’입니다. 성탄절은 우리 인류에게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인류에게 가장 큰 행복을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그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하심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는 죄 없으시기에 죗값을 지불하려고 오신 것을 성탄이라 하였으니, 곧 거룩한 탄생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인간에게 감당이 안 되는 축복입니다.

하나님 아들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러 오셨으니, 어떻게 이 은혜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나에게 목숨을 줘서 내 목숨이 이 땅에서 더 유지되는 것도 갚을 길 없는 은혜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목숨을 줘서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구원해 주시고 영생을 얻게 해 주셨으니, 어찌 감당할 길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주님의 목숨을 대속물로 받지 아니하면 지옥을 피할 길이 없으니 그분의 섬김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은혜를 입고도 그분 앞에 인색하고 예수 믿기 힘들다고 한다면 얼마나 답답한 일일까요. 예수 믿기 힘들게 만들어서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것은 바로 마귀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마귀역사를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성탄을 오해하여 방종하지 말라
예수 믿는 것처럼 쉬운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섬겨 주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천국에 갑니다. 죄를 내놓고 회개하면 지옥을 면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성탄의 목적을 알지 못해서 그저 성탄절에 방종하며 술 마시고 성적으로 타락하고 이성 간에 못된 짓을 많이 합니다.

성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여 성탄절에 오히려 방종과 방탕과 타락의 극치로 하나님을 향한 대적과 불순종의 바벨탑을 쌓고, 저주와 죄악의 광란 속에서 축배를 들며 파멸과 멸망으로 점점 비대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성탄을 더럽게 만들고 짓밟고 방탕의 극치로, 저주로 만들며 우리를 속이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속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알고, 그의 목숨을 대속물로 받으려고 죄를 들고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내 대신 죽어서 내 죄를 갚아 주셨으니, 성탄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과 지옥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게 된 것에 최상의 감사를 올려 드려야 합니다.


일러스트/노혜지


성탄을 오해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짓밟고 파괴하고 거룩한 것을 개나 돼지처럼 불의와 바꾸는 행위는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하는 짓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을 오해한 현실입니다. 그럴지라도 주님은 우리를 그토록 섬기고 사랑하셔서 종이 되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하셨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성탄절을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진주를 돼지에게, 거룩한 것을 개나 돼지에게 주듯 이성 없는 짐승처럼 보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성탄절을 세속적으로 방탕하게 보내는 것은 주님을 아프게 하는 것이요, 주님의 성탄을 모독하고, 주님의 명예를 훼손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주신 뜻을 알고, 십자가에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대속물로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 죄를 담당하신 어린양 예수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5~8).

그가 이같이 오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 함이니 곧 인류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그분은 종의 형체를 가지고 오셨으나 선지자로서 천국을 선포하셨고, 제사장으로서 친히 어린양이라는 제물이 되셨고, 모든 것의 왕으로서 그 절대 권세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또 최후의 순간에 인간의 죗값을 대신 치르려고 겟세마네 동산, 가야바의 뜰, 빌라도 법정을 지나 골고다 언덕을 향해 십자가의 대행진을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 같은 수난의 행진은 수치와 고난과 피로 얼룩진 참혹하고 비참한 현장이었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에게는 허탈과 오해와 통곡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최후의 행진은 인류의 죄와 허물과 징계와 질병을 깨끗이 해결하시고 진리 안에서 자유를 영원히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1~32).

예수 그리스도가 죄에서, 질병에서, 저주에서, 징계에서, 지옥 멸망에서 자유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육신의 자유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영원한 자유를 말합니다.

이 같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어진 최고의 선포를 믿는 자마다 고통과 가난과 불가능에서 자유를 얻고 모든 불가능에서 해방과 기쁨을 누리며, 공포와 불안과 절망에서 평안과 기쁨을 자신의 몫으로 소유합니다.

성탄은 하나님 아버지께는 아들의 수난을 섭리하심이요,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수난 계획을 실천하신 것입니다. 또 성령께는 아버지와 아들로 이루신 성탄의 결과를 우리에게 주려고 역사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이며,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증거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요, 성령의 체험이요, 성탄의 모든 은총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사도와 초대교회의 증거는 오직 성탄으로 이루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입니다.

육체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십자가로 인하여 인류의 영육 간 모든 짐을 짊어지심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죄로 말미암은 인류의 영육 간 모든 고통을 담당하신 우리의 구세주요, 하나님의 어린양이시니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온 세상 죄를 지고 가려 이 땅에 오신 어린양 예수를 보십시오. 누구를 위해서 죄와 저주와 질병을 담당하고 계십니까? 성탄을 보십시오. 당신을 위해 오신 구세주를 보십시오.

당신의 비참하고 참혹한 영육 간의 멸망을 담당하려는 예수 그리스도, 육체로 오신 하나님을 보십시오. 지금 확실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 어린양을 보십시오.

위 글은 교회신문 <464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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