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8)] 감옥에서 쓴 『독립정신』
멈추지 않는 집필 정신

등록날짜 [ 2013-03-12 11:05:22 ]

근대 민족주의 체계를 잡는 기념비적 저서


<사진설명> 1904년 한성감옥에서 완성된 <독립정신>(왼쪽).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1910년 판(오른쪽).
이 책에서 이승만은 한국인들이 선진적인 서양 문물을 빨리 배워 부국강병의 목표를 달성해야만 일본에게
빼앗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승만을 감옥에 집어넣은 것은 뜨거움이었다. 열혈 청년으로 명성을 떨친 들끓는 애국심이 이승만을 거리로 내몰았다. 내면에서 솟아오른 불덩어리가 열변을 토하게 했다. 이십 대 육체를 사로잡은 불길 같은 열정이 격투를 벌이며 싸우게 했다.

감옥에서도 의미 있는 일을 하려는 정열은 식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도 왕이 되고 논설을 썼다. 학교를 만들고 도서관을 운영하며 환자를 돌보았다. 독서에 몰두하고 영어 실력을 갈고닦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보통 사람이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어려운 작업을 시작했으니, 바로 영한사전 편찬이다.

정확히 표현하면 ‘영한한(英韓漢) 사전’이다. 이승만이 편찬한 사전은 영어와 한글과 한문을 병행하고 있다. 그것으로 이승만은 또다시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영한사전 편찬을 시도했고, 이승만은 A에서 F까지 단어 총 8223개를 번역했다.

작업을 수행한 날짜를 따져 보면 하루 평균 단어 20개 정도와 씨름한 셈이다. 남아 있는 원고를 살펴보면, 동서양 학문에 능통한 이승만의 학식이 사전에 고스란히 배어 있어 뛰어난 수준임을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완성되었다면, 한국 최초의 영한사전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전 편찬 작업은 1904년에 중단되었다.

1904년 2월, 동북아를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러일전쟁이 터졌다. 러일전쟁은 한마디로 ‘조선 땅을 누가 먹느냐’는 싸움이었다. 전쟁의 승자가 조선을 차지하는 것이 예정된 순서였다. 이승만의 피가 또 한 번 뜨거워졌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는데, 한가로이 사전이나 만들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감옥 친구 유성준도 거들었다.

“독립협회 이전에 한 모든 개혁 운동이 실패한 원인은 지도자들이 일반 민중을 교육 대상으로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네. 지도자들만 참여하는 개혁이 아니라 독립운동 여론을 조성해야 하네.”

조선이 독립하려면 백성이 깨어나야만 했다. 백성을 일깨우려면 선각자(先覺者)의 외침이 필요했다. 감옥에 있던 이승만이 역사(歷史)의 호출을 받았다. 1904년 2월 19일. 만 스물아홉 살인 죄수가 『독립정신』이란 책을 한성감옥에서 집필하기 시작했다.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독립정신』이라는 책에 수많은 찬사가 쏟아졌다.
이원순은 “자유주의자의 영감에서 나온 뛰어난 책이다”고 말했다. 서정주는 “저 방대하고도 철저한 선지자의 글”이라고 멋스럽게 표현했다.

이한우는 “유길준, 김옥균, 서재필 등이 시작한 초보적 수준의 개화론이 근대 민족주의로 체계화되는 전환점을 맞게 하는 기념비적 저서”로 보았다. 미국 연설학회 회장과 대학교수를 지낸, 이승만의 오랜 동료 로버트 올리버(Robert Oliver)는 “『독립정신』은 한국인의 정치적 성서다. 이 저서를 차근차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승만을 옳게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김길자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이승만이 이 책에 그린 나라와 백성의 조건은 글로벌 현대 선진국 모습 그대로다. 이승만을 논하려는 자, 모름지기 이 책부터 읽기를 간곡히 부탁하고 싶다. 『독립정신』에 나타난 국가 정신이야말로 이승만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유영익(現 연세대학교 석좌교수)은 이승만에 관한 자료 수천 건을 분석하여 새로운 결과를 쏟아내는 대표적인 한국사 연구가다. 흥미롭게도 유영익은 이승만이 잘못된 정치를 하는 것에 분개해 정치학과에 지망했다. 4·19가 일어났을 때, 유영익은 열렬히 찬동했다. 그러나 이승만에게 부정적이었던 유영익은 미국에서 새로운 계기를 맞는다.

“1960년대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유학할 때였습니다. 옌칭 연구소 도서관에서 이승만이 쓴 첫 저서 『독립정신』을 읽으면서 19세기 말 조선 청년 이승만의 비범한 역사관과 세계관에 은근히 놀랐지요. 젊은 나에겐 솔직히 같은 시대 박은식이나 신채호의 역사관, 세계관과 비교하여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유영익 교수)

유 교수는 이후 19세기 한국 현대사 연구에 초점을 모으면서 마침내 4·19 때 가졌던 이승만 대통령에게 부정적이던 고정관념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 교수는 “19세기 후반 한국 역사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인 대원군, 고종, 명성황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유길준, 윤치호, 최제우, 전봉준 등과 비교할 때 당시 이승만의 식견과 행동은 매우 탁월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고 말한다.

이승만 연구를 필생 과업으로 여기는 유영익은 『독립정신』이 옥중에서 5년간 독서로 터득한 ‘독립을 위한 기본 상식 교과서’며, “이승만의 감옥 대학 졸업 논문”이라고 표현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2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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