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14)] 우리 민족 최초의 국제법 박사
미국인도 선망하는 명문대학 세 곳, 5년 만에 졸업

등록날짜 [ 2013-04-30 10:24:40 ]

조지워싱턴대학을 졸업한 이승만은 하버드대학교에 편입 신청서를 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자신만만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오만하다고 여겨지는 이승만의 성격을 보여준다.

간단히 요약하면 “나는 한국에서 중요한 일을 했기에 내가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한국에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시간 여유가 없다. 그러므로 2년 이내에 박사 학위를 받아야 한다. 내게 박사 학위를 줄 수 있다면 하버드로 갈 것이고, 줄 수 없다면 조지워싱턴대학으로 가겠다. 조지워싱턴대학 교수들도 내가 2년이면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는 내용이었다.

보기 드문 동양 유학생인 데다가, 투옥과 기독교 선교 등 예사롭지 않은 경력에 끌려서인지, 아니면 학생들이 낸 의견을 존중하는 교수들의 인격 때문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말도 안 되는 이승만의 편지를 받고 하버드의 교수들은 회의를 거쳐서 답장을 보냈다. 미국 학생들도 2년 만에 박사 학위를 마치기 어려우니, 일단 하버드로 와서 1년만 석사 과정을 해보고 판단하라고 제안했다.

이승만은 하버드에 입학했다. 예나 지금이나 첫손가락에 꼽히는 명문이지만, 이승만은 실망스러웠다. 하버드는 기독교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승만은 학교를 옮기기로 마음먹고 뉴욕에 가서 몇몇 학교에 원서를 써놓았다. 그때 우연히 서울에서 알고 지내던 선교사를 만났다. 선교사는 “자네가 그 유명한 이승만 아닌가?” 하고 반가워했다.

이승만이 처한 사연을 들은 선교사는 자신의 모교이며, 기독교를 중심으로 세워진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이수하라고 권유했다. 그리고 직접 이승만을 데리고 가서 웨스트 프린스턴 대학원장에게 소개했다. 대단히 유능한 인물이고 한국 기독교 발전에 엄청난 공로를 세울 것이라며 추천했다.

프린스턴 대학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이승만은 또 한 번, 다소 오만하게 들리는 질문을 던졌다.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니, 2년 만에 박사 학위를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대학원장은 노력하겠다고 대답하며 신학교 무료 기숙 혜택을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이승만은 결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게 되었다.

이승만은 유학 생활 중 프린스턴에서 가장 즐겁게 지냈다. 당시 프린스턴대 총장은 훗날 뉴저지 주지사를 거쳐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이었다. 윌슨은 이승만을 아꼈고 자신의 집에 초청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총장 집을 드나들며 총장 가족과도 가까이 지내는 몇 안 되는 학생 중 하나였다. 이승만을 높이 평가한 윌슨 총장은 주변에 ‘미래 한국의 구원자’라고 이승만을 소개하기도 했다.


<사진설명>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을 때 묵었던 기숙사 방(1901년 촬영).

2년 만에 박사 학위를 줄 수 있느냐는 이승만의 질문은 허세나 오만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실제로 2년 만에 프린스턴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다. 이로써 미국의 학사-석사-박사 과정을 단 5년 만에 마치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미국인이 보통 12년 정도 걸리는 과정을 절반도 안 되는 시간에 해치웠다.

오늘날처럼 영어 학원과 강좌가 즐비한 시절도 아니고, 심지어 사전조차 없던 시절에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 냈다. 고문을 당하고 6년 가까운 세월을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지성은 전혀 녹슬지 않고 오히려 더욱 예리해졌던 것이다.

미국인은 이승만이 졸업한 조지워싱턴, 하버드, 프린스턴 대학들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그런 학교들을 5년 만에 마친 실력은 훗날 미국인을 상대하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된다. 실제로 미국 고위 관료와 외교관들은 이승만의 탁월한 지성에 압도되었으며, ‘미국인보다 미국 정치 역사를 더 잘 아는’ 이승만에게 경의를 표했다. 미국 초대 대사로 한국에 부임한 존 무초(John J. Muccio)는 “이승만이 미국 역사를 이야기하면 넋을 잃어가며 들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승만의 박사 학위 논문은 『전시 중립론-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이었다. 일차적으로 국제법에 관한 논문이었지만, 주제의 성격상 역사학, 정치학, 경제학도 결부되었다. 따라서 세 학과로부터 공동 승인을 받은 특이한 논문이었다.

이승만이 논문의 주제를 국제법으로 잡은 이유는 뚜렷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이승만이 박사 학위를 받은 지 90년이 지난 후, 논문을 번역한 법학자 정인섭은 다음과 같이 추측했다.

“구한말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이 땅에서 펼쳐졌다. 이승만은 대한제국의 국외중립선언이 무참히 짓밟히는 현실을 목도했다. 이승만은 국제법상 전시 중립의 실체와 역사에 관심을 두었을 것으로 보인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3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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