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회계연도를 시작하며] 예수로 얻은 구원의 큰 영광을 위하여!
등록날짜 [ 2013-05-14 15:39:54 ]
대학 시절 스승인 美 대통령 윌슨과 두터운 관계 이어 가
<사진 설명> 일제의 탄압을 피해 이승만이 서울을 떠나기에 앞서 서울YMCA 간부들과 함께 찍은
송별모임 사진(1912년). 이승만은 33년 후인 1945년에야 다시 귀국하게 된다.
105인 사건으로 명명된 탄압의 마수는 처음부터 이승만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승만 본인도 구속될 각오를 했다. 그러나 위급한 상황에서 또 한 번 미국 선교사들이 이승만을 구출했다.
서울 YMCA에서 활동하던 질레트(Gillett, Philip L.) 총무와 마침 그때 한국을 방문한 YMCA 국제 위원회 모트(J. R. Mott) 총무가 개입하여 이승만은 체포를 면했다. 선교사들은 총독부 측에 “미국 교계에 상당히 이름이 알려진 이승만을 체포하면 국제적으로 말썽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일단 구속은 면했지만, 한국에 머무르는 것은 여전히 위험했다. 마침 1912년 기독교 감리회 4년 차 총회가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다는 소식이 들렸다. 주한 선교사들과 감리교계 목회자들은 한국 대표로 이승만을 파견하기로 했다.
이승만은 집을 저당 잡아 여비를 마련했다. 이승만이 한국을 다시 떠난 날은 공교롭게도 만 37세 생일이었다.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지 2년이 채 못 되어 기약 없는 망명길에 올랐다.
당시 75세인 아버지 이경선은 중풍으로 누워 있었다. 이승만은 눈물로 아버지께 작별 인사를 드렸다. 아버지는 문 앞까지 마중 나왔지만, 차마 6대 독자 외아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손만 흔들었다.
영웅은 아무나 못할 노릇이다. 가족에게도 그렇고 부모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양반이며 왕족이던 이승만은 일찍이 상투를 잘라 유교 문화에서 살아온 부모에게 충격을 주었다. 스물두 살 나이에 보부상들과 격투를 벌일 때, 시위 현장까지 찾아온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눈물로 만류했다.
당시 신문에는 이승만이 죽었다는 기사가 여러 번 실렸다. 보부상에게 맞아 죽었다고도 했고, 고문받다가 죽었다고도 했다. 아버지가 감옥까지 찾아와 아들의 시체를 달라며 울고불고 한 적도 있었다. 이제 아들은 시대의 풍운에 밀려 떠돌이 망명자 신세가 되었다. 1912년 3월 26일 이승만 부자는 눈물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세계 감리교 총회에 참석한 이승만은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규탄하며 기독교 정신을 내세워 한국의 주권을 찾아줄 것을 호소했다.
“기독교나 민주주의 정신은 약자를 보호하는 데 있다. 지금 일본은 무력으로 한국의 주권을 빼앗고 한국인을 지독히 탄압하고 있다. 그러니 전 세계 기독교인은 모름지기 결단하여 이 핍박 받는 민족을 하루빨리 해방하고, 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하고, 나아가 세계 평화유지에 이바지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이승만이 한 연설에 공감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과 오랫동안 동맹 관계였다. 미국 기독교인이 지닌 견해도 미국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승만은 감리교 세계 대회를 마치고 프린스턴 시절에 가르침을 받은 스승 윌슨을 찾아갔다. 당시 윌슨은 주지사를 거쳐서 대통령 후보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윌슨에게 한국의 해방을 세계에 알리는 성명서에 서명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윌슨은 거절했다.
“개인적으로는 얼마든지 당신의 뜻에 동의한다. 그러나 미국 정치를 생각하면 서명할 수 없다. 하지만 약소국을 위한 방책을 생각 중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훗날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을 때, 이승만은 “약소국을 위해서 할 일”이 그것인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윌슨은 한국 독립에 찬동한다는 서명에는 거절 의사를 나타냈지만, 강연 추천장은 기꺼이 작성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 이승만에게 충고했다.
“나 한 사람의 서명을 받는 것보다, 미국인 마음의 서명을 받으시오.”
필자의 소견으로, 이때 윌슨이 이승만에게 던진 한마디는 대단히 큰 영향을 끼쳤다. 이승만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 전체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훗날 이승만은 미국의 양심과 여론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연설과 독립운동을 줄기차게 진행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도 미군과 대립이 심각해지자, 군정 당국을 뛰어넘어 미국 여론을 선동하고 직설적인 행동으로 맞섰다. 휴전 협정 과정에서도 계속해서 뉴스를 만들어 내고 여론을 일으켜서 미국을 압박했다.
이후로도 윌슨은 이승만을 거절하고 상심케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윌슨이 이승만에게 가르쳐 준 것은 절묘한 한 수였다. 스승은 과연 스승이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37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