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기독교선교교회연합회 취약계층에 쌀 700포대 전달
“이웃 영혼 주님처럼 섬기겠습니다”
등록날짜 [ 2013-11-27 09:26:21 ]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가난한 구두 가게 점원이었으나
오직 주님만 의지한 목회로 사도행전적 부흥의 역사 이뤄
드와이트 라이먼 무디(Dwight Lyman Moody)는 1837년 2월 5일 매사추세츠 노스필드에서 태어났다. 무디 집안은 가난했다. 무디가 네 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채권자들이 어머니를 몰아세웠다. 심지어 연료로 쓸 장작마저 강탈해갔다. 가난 탓에 무디는 정규 교육을 5년 정도밖에 못 받고 돈벌이에 나섰다.
17세 되던 1854년 3월, 무디는 삼촌이 운영하는 구두 가게에서 일하려고 보스턴으로 향했다. 삼촌인 샘 홀턴은 무디를 점원으로 받아들이면서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교회에 다녀야 하는 것이었다.
무디는 삼촌과 한 약속을 지키려고 교회에 나갔다. 그런데 목사님이 자신의 마음을 훔쳐본다고 생각할 정도로 설교 말씀에 푹 빠져들었다. 교회에 나간 지 1년이 지났을 때, 교회학교 선생인 에드워드 킴볼이 무디가 일하는 가게를 찾아왔다. 킴볼 교사는 무디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무디는 예수의 사랑을 뜨겁게 체험했다. 후에 무디는 당시 상황을 황홀하게 말했다. “저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뜬 태양은 유난히 더 밝게 빛났고, 새들은 더욱 즐겁게 지저귀었습니다. 제게는 최고로 기쁜 날이었습니다.”
무디는 노스 웰스 스트리트에 있는 작은 선교회에 들어가 주일학교 교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선교회 책임자는 마치 둘러대듯이 말했다. “이곳 교사 수는 학생 수만큼이나 많습니다. 그러니 교사가 되고 싶다면 학생을 데리고 와서 반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다음 주일, 무디는 누더기를 입은 가난한 아이 18명을 데리고 선교회에 나타났다. 그 후 주일학생 수는 두 배로 늘어났다. 훗날 무디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 주일은 제게 가장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제 사명이 무엇인지 발견했습니다.”
1860년 6월, 무디는 장래 사역을 위해 나아갈 지침을 준 큰 교훈을 얻는다. 결핵으로 죽어가는 교회학교 교사가 있었다. 그 교사는 하늘나라로 가기 전에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이 주님을 영접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그래서 학생들 집을 일일이 심방했다. 이때 무디가 그와 함께했다. 열흘간 지속한 그 경험은 무디에게 평생 잊지 못할 감명의 순간이었다. 무디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가가 되기로 한다.
이후 무디는 복음 사역을 위해 자신의 사업을 그만뒀다. 그리고 주님의 거룩한 사업에 자신이 가진 모든 물질과 시간을 바쳐 일했다. 주일학교가 성장을 거듭하자 큰 술집을 개조해서 더 많은 아이를 초청해 전도집회를 이어갔다.
또 일리노이 스트리트에 자립교회를 세워 복음 전파에 힘쓰면서 일리노이 주(州) 연합주일학교 위원으로도 위촉되어 활동했다. 1866년에는 시카고 YMCA 회장으로 선출돼 1870년까지 임기를 수행했다. 그 당시 영문 ‘Y’라는 대문자 하나만으로도 시카고 청년들에게는 주님을 영접하는 복음 사역의 상징으로 통했다.
무디가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을 사람은 단연 해리 무어하우스라는 이름의 전 프로 권투선수다. 죄악에 빠진 삶에서 벗어나 주님을 영접한 무어하우스는 담대한 복음 전도자로 변신했다. 무어하우스와 무디는 서로 닮은 점이 많았다. 무디는 무어하우스에게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무어하우스는 무디에게 “자기 자신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교하라”고 권면했다. 이와 더불어 “성경을 분석하고 성경 전체 맥락을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설명해 주었다. 이는 무디에게 두 번째 회심과도 같은 일이었다.
또 한 가지 교훈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토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 무어하우스의 설교를 들을 때 깨달았다. 무디는 무어하우스의 설교를 들으면서 영적인 눈이 열렸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그토록 애틋하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제 완고한 마음은 녹아내렸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무디는 부흥사로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는다. 1874년 2월부터 4월까지 스코틀랜드에서 무디의 부흥집회가 열렸다. 총 6000여 명이 신앙을 고백하고 회심했으며, 7000여 명이 교회에 출석했다.
미국,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중심으로 수많은 부흥집회가 열렸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로마가톨릭에서 발행하는 출판물은 대개 무디가 여는 집회에 적대적이었다. 하지만 사도행전적 성령의 역사는 거침없이 이어졌다. 영국에서는 무디의 부흥집회가 열리는 동안 대략 추산해도 250만 명이 무디의 설교를 직접 들었다. 또 각기 다른 장소에서 대중 부흥집회가 285차례나 열렸다.
무디의 부흥집회는 하나님의 영광과 승리로 가득 찼다. 이런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세 가지로 정리해보았다.
첫째, 무디는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정을 지닌 성령 충만한 인물이었다. 돈과 명예는 그의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둘째, 무디의 집회는 늘 기도가 뒷받침되었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기도를 독려했다.
셋째, 무디는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진행했다.
1899년 12월 22일, 무디는 가족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하나님 곁으로 떠났다.
“하늘이 나를 위해 열리는구나. 정말 아름답다! 마치 환상의 세계 같구나. 이것이 죽음이라면 정말 즐거운 것이구나.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있어.”
/정리 정한영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363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