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31)] 소련 지령을 받은 공산당과 대결
반탁운동

등록날짜 [ 2013-09-03 11:12:58 ]

해방 정국 주도권 싸움에 밀리지 않는 노익장 과시


<사진설명> 신탁통치 반대 군중대회(1946년 1월).

당시 소련과 공산주의는 그 인기가 세계적으로 절정에 달했다. 소련군은 2차 대전 중 나치 독일군을 상대해 영웅적으로 싸웠다. 특히 1943년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현재 이름은 볼고그라드) 결전에서 독일군을 섬멸한 일은 전세를 역전한 쾌거로서 세계인들의 가슴을 뛰게 하였다.

소련은 2차 대전에서 2000만 명이 죽는 엄청난 희생을 치렀으나 미치광이 히틀러를 꺾은 전승국으로 자리했다. 미국 국무부, 재무부에 있던 고위 관료 중에는, ‘무계급 평등’이라는 공산주의 선전과 영웅적인 투쟁에 매료돼 자발적으로 소련 첩자로 변절한 고위관료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공산당 극렬분자를 ‘반역자’‘파괴자’라고 정확히 규정하였다. 소련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반역 공산 세력과는 국가를 세우는 길을 함께 갈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 연설은 건국 지도자가 한 선언으로, 이승만은 2차 대전 이후 공산당에게 세계 최초로 정면 대결을 선언한 셈이다. 트루먼 독트린은 그 후 2년 뒤에야 소련을 향해 대결 노선을 천명했다.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프롤레타리아의 조국’이라고 불렀다. 김일성과 박헌영 역시 스탈린이 내린 지령에 절대복종했다. 이승만은 그 점을 지목하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승만은 남한과 북한 내 공산주의자들이 스탈린이 부리는 졸개이며 매국노라는 점을 직설적으로 폭로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을, “한국사람 모습을 하고 와서 우리 몫을 빼앗아 소련에 갖다 바치려는” 민족 반역자로 묘사하였다. 모습은 한국인이지만, 실상은 소련에 충성을 바치는 간첩이라고 지적했다.

당시만 해도 남한에서 공산당 활동은 불법이 아니었다. 표면적으로는 우익과 좌익이 죽기 살기로 싸운 시기도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70세 노투사가 위대한 선제공격을 했다”고 표현할 만큼 이승만은 강경하게 연설했다.

제대로 얻어맞은 조선 공산당 박헌영은 “세계 민주주의 전선이 분열하게 책동하는 파시스트 이승만 박사의 성명을 반박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표현은 극렬했지만 효과는 신통치 않았다. 공산 세력이 주도한 인민 공화국이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한 일이 불과 석 달 전인데, 갑자기 파시스트라고 공격하니 앞뒤가 안 맞았다.

이승만에게서 보이는 천재성 중 하나는 바로 타이밍이다. 공산당에게 기습 공격을 가한 일자가 12월 17일이다. 이어 박헌영이 반박하자 남한 정국은 공산주의자들을 두고 찬반양론이 뜨거웠다. 논쟁이 한창 달아오르던 12월 26일에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과로 신탁통치안이 발표됐다.

한국인들에게 자치 능력이 없으므로 강대국들이 5년간 신탁통치를 하겠다는 내용이 알려졌다. 신탁통치는 우리 민족을 모독하는 결정이었다. 5000년 독립국이던 우리가 자치를 못 한다는 지적은 화약고와 같던 민심에 불을 붙였다. 즉각 김구와 이승만이 주도하는 반탁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공산당도 처음에는 반탁 흐름에 밀려가는 듯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박헌영이 있던 조선 공산당은 찬탁인지 반탁인지 태도를 결정하지 못했다. 소련이 지령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헌영은 서울 주재 소련 영사관을 찾아가 지침을 받으려 했으나 영사관 측은 본국에서 훈령을 받지 못하였다고 했다.

결국 박헌영은 12월 28일 밤 비밀리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갔다. 그곳에서 소련군 민정 사령관 로마넨코가 지침을 내렸다. 신탁통치를 결의한 모스크바 협정을 지지하라는 지령이었다.

지령을 받은 박헌영은 1946년 1월 2일 서울로 돌아와 신탁통치 지지 성명을 발표했고, 남한 민중은 공산주의가 지닌 실체를 경험했다. 불과 1주일 전에 이승만이 공산당은 사대주의자에 매국노라고 비판했다. 그 말이 귓전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공산당은 강대국이 조국을 다스린다는 데 찬성하고 나섰다.

이승만이 예측한 말이 옳다는 사실을 공산주의자들 스스로 입증한 셈이다. 이승만은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함으로써 해방 정국을 이끌 주도권을 장악했다. 해방에서 건국까지 3년 동안, 이승만이 지닌 넓은 시야가 다른 지도자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차이를 만들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5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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