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침례교 역사 속 믿음의 인물들 2
침례교 2대 감목 이종덕 목사

등록날짜 [ 2008-07-29 15:28:29 ]

교단 발전을 위해 노력하다 6ㆍ25전쟁 중에 순교

복음의 씨앗을 이 땅에 전파한 침례교 최초의 펜윅 선교사에 이어 한국 침례교단의 제2대 감목으로 이종덕 목사가 추대되었다. 감목에 추대된 이종덕 목사는 온 힘을 다해 억눌려 살던 민중에게 희망의 복음을 전했으며, 침례교단의 주춧돌을 놓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입교와 목사 안수
이종덕 목사는 1884년 충남 공주군 탄천면 신영리(백암골)에서 이세영 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기독교가 이 땅에 빛을 비추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하나님을 영접했다.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예수님 닮은 삶을 살기 위해 믿음을 키워가던 이종덕은 주님을 위해 모든 삶을 드리기로 결심하고 1910년 4월 정든 고향을 떠나 함경도 원산에 도착, 펜윅 선교사가 시작한 성경공부에 참여했다.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오직 복음만이 나라와 민족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성경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이종덕은 1911년 11월에 교사 직분을 받았고 전국 각처를 돌며 열심히 전도했다. 이렇게 해서 모여진 사람들을 모아 동네 사랑방이나 믿음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렇게 하면서 전국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일본의 교회 탄압과 망명
일본인들은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종교법안을 선포하고 국내에 있는 모든 교단을 하나로 통합하여 관리하였다. 많은 교단들이 이에 합류했지만 침례교만은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특히 신사참배는 받아들일 수 없는 우상숭배였으므로 불응하기로 결의하자 일제는 침례교단에 속한 모든 교회에서의 예배를 금지시켰고, 모든 집회도 금지시켰다. 이 감목은 감옥에 갇혔고 교회들은 모두 문을 닫았다. 감옥에서 풀려난 이 감목은 이 땅에서는 더 이상 정상적인 목회사역을 감당할 수 없음을 깨닫고 만주로 망명했다. 1917년 제12회 대화회를 간도에 있는 종성동에서 열었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신앙인들이 순교자적인 믿음으로 교회를 지키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해방과 귀국 후의 활동
1945년 해방이 되자 이종덕 목사는 만주에서 귀국했다. 전국을 돌며 교회들을 방문하여 흩어진 교회를 세우는 데 총력을 다했다. 이때 침례교의 모든 목회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성도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교회들은 빠르게 회복되어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인 1946년 9월 강경에서 총회를 개최했다. 1949년 강경총회에서는 교단의 명칭을 동아기독교에서 대한기독교침례교회로 명칭을 바꾸는 동시에 미국 남침례회 외국선교부와 제휴할 것을 총회에 제안하여 통과했다. 이러한 변화는 침례교회가 일반사회에서나 타교파에서도 공인받는 계기를 만들었다.

6·25사변과 이 목사의 순교
전쟁 중에도 교회를 떠날 수 없다며 한사코 교회에 남아 예배를 인도하던 이종덕 목사는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던 밤에 교회에서 자다가 옆집에 살던 김요한 집사와 함께 공산당에게 끌려갔다. 이때 이미 순교를 각오한 이종덕 목사는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사모에게 주면서 “하늘에서 만납시다”라는 말을 남기고 순한 양처럼 공산당에게 끌려갔다. 이 목사는 같이 가던 김요한 집사를 기회를 만들어 피할 수 있도록 했다. 1950년 9월 28일 공산당들에게 끌려간 이 목사는 곧바로 총살당하고 숭고한 피를 이 땅에 뿌렸다.
이종덕 목사는 27세에 입교해 전 생애를 주의 사업에 바쳤다. 본 교단의 역대 감목과 총회장으로 시무하면서 일제에 짓밟혔던 교회를 복원하고 공산당에 당당히 맞서서 싸우면서 교단 발전에 심혈을 기울였고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사역을 훌륭히 감당하다가 끝내 순교의 피를 흘렸다.

/ 자료출처 <한국침례교인물사> (김갑수, 요단출판사)

위 글은 교회신문 <13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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