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훌] 천국의 소망을 나누는 기독교 장례식

등록날짜 [ 2011-09-13 15:33:03 ]

최근 할머니 장례 치르며 깨달은 점 많아
‘영혼의 때’ 준비하는 계기 되기를 기도

나라마다 장례 풍습이 다른 것은 죽음의 의미가 다르고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도인들이 화장하는 이유는 죽음을 통해 세상의 삶을 완전히 끝내고 영원한 자유를 얻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화장을 영원한 불멸의 삶으로 가는 신성한 의식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반대로 터키인들은 화장을 망자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여 금기시한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철저히 구분하여 반드시 죽은 자만 쓰는 침상을 따로 마련하며 숨이 끊어지면 동전이나 찻잎을 입에 채워 빈손으로 떠나지 않게 한다고 한다.

유교식 가부장제 문화인 우리 전통장례는 절차가 유독 까다롭고 여러 단계를 거치는데 죽은 이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조상의 음덕을 누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많이 간소화했지만 지금도 문상, 발인, 노제 등에 이런 유교적 사고가 남아 있으며 전통을 중시하는 상류층일수록 명당에 묘소를 만들고 기일에 제사를 지내는 게 관습이다. 사당을 두고 차례를 지내거나 성묘를 하는 것도 조상을 섬기면서 가문의 뿌리를 확인하는 유교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한다.

새삼 장례에 대해 언급한 것은 지난주에 할머니 상을 치르면서 기독인들의 장례의식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향년 94세로 별세하신 할머님은 유독 장손인 나에게 각별한 애정을 쏟으셨으며, 친척들을 방문할 때마다 어린 손자를 데리고 다니시는 것을 무척 좋아하셨다.

정정하시던 할머니가 몇 달 전부터 기력이 쇠약해지고 치매 때문에 가끔 사람도 못 알아보시자 올해를 넘기지 못하겠구나 생각은 했지만, 막상 위독하시다는 요양원 측 연락을 받았을 때는 착잡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다행히 우리 가족과 목사인 매제가 급히 도착해 임종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할머니는 숨을 거두셨고 나는 차가워지는 손을 붙잡고 “천국에서 편히 쉬시라고” 인사를 드렸다.

10년 전 건강하시던 필자의 아버지가 갑작스레 뇌출혈로 숨을 거두셨을 때 한마디 말도 듣지 못해 마음이 아팠는데 할머니 역시 이슬 맺힌 희미한 눈빛으로 유언을 대신하셨다.

장례식 주관은 할머니가 마지막까지 다니시던 교회에서 담당했지만 우리는 상주인 숙부님과 고모님들을 설득해 연세중앙교회에서 설치해준 단으로 빈소를 꾸몄다. 보통 영정 주변에 향이나 초를 설치하고 꽃으로 둘러가며 요란하게 꾸미지만 할머니 빈소는 단아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새하얀 천에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요11:25~26)는 성경 말씀이 그리고 영정의 좌우로는 빈소에 절을 하지 말고 유가족에게 위로의 말씀만 부탁한다는 말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낯설어하는 조문객들도 뜻을 이해하고 헌화나 분향은 물론 재배도 없이 상주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순조롭게 문상을 진행하였다. 적지 않은 분들이 이런 빈소의 풍경을 신기해했지만, 기독교의 장례 의미를 잘 살려서 좋다는 격려의 말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고인을 떠나보내는 자리라 많은 추억과 평소 더 잘해 드리지 못한 미안한 마음과 회한도 들었지만, 할머니 덕에 모처럼 친척들과 많은 얘기를 하면서 서운한 감정도 해소할 수 있었고 새삼 생명이 지속하고 있다는 깨달음에 감사할 수 있었다.

세상의 장례식이 죽은 자를 기리고 그를 신성한 존재처럼 추모하는 의식이라면 기독인의 장례식은 산 자를 위한 것이고 영혼의 때를 준비하는 계기여야 한다. 

위 글은 교회신문 <25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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