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훌] 요즘 신문 보기 싫다

등록날짜 [ 2017-02-20 15:09:11 ]

선정적이고 허위 사실 가득한 ‘황색언론’ 보도 최근 넘쳐나
왜곡된 정보 홍수 속에 옳고 그름 분별할 혜안 있어야


필자는 업무 특성상 여론의 흐름을 늘 예의주시하고 필요한 자료나 정보를 구하려고 언론기사를 자주 검색한다. 그러나 인터넷 포털로 서비스되는 신문 기사를 마주하다 보면, 신경에 거슬려 피로감을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독자의 흥미를 자극하려고 선정적이거나 과장된 내용을 게재하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경쟁이 치열한 디지털 신문은 조회 수를 늘리려 시시콜콜한 가십성 기사를 대단한 일인 것처럼 다루는 경향이 있다. 이 중에는 알 권리 또는 표현의 자유라는 기치 아래 타인의 사생활을 그대로 드러내거나 명예 훼손에 해당하는 내용도 꽤 많다. 또 여과 없이 보도되는 끔찍한 패륜 범죄나 성범죄·성 추문 같은 노골적인 기사는 속이 메스꺼울 정도다.

이런 기사들은 이른바 ‘황색언론(yellow journalism)’이라 조롱받을 만하다. ‘황색언론’은 독자의 시선을 끌려고 ‘선정주의(sensationalism)’에 호소함으로써 인간의 불건전한 감정을 자극하는 범죄, 괴기사건, 성적추문 등을 과대하게 취재·보도하는 것을 말한다.

황색언론이라는 용어는 19세기 말엽 미국 신문왕 조지프 퓰리처(Pulitzer)에 의해 탄생했다. 퓰리처는 “신문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르치는 도덕 교사”라 공언하고 자사 기자들에게 “첫째도 정확, 둘째도 정확, 셋째도 정확”을 강조한 인물이다. 동시에 “재미없는 신문은 죄악”이라는 신념 또한 고수했는데, 당시 뉴욕의 유력 언론사와 벌인 경쟁에 지지 않으려 선정주의에 호소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그 대가로 사회적 비난을 사고 숱한 명예훼손 소송에 휘말렸다. 말년에는 자신의 불명예를 씻으려고 콜롬비아 대학에 재산을 기부하고 작가와 언론인에게 수여하는 상을 제정해 지금에 이르렀다. 오늘날 퓰리처의 이름은 황색언론을 낳게 한 극단적인 보도 전쟁보다 ‘퓰리처상’으로 더 많이 회자(膾炙)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언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언론이 무엇을 어떻게 보도하고 어떤 논조를 펴느냐에 따라 한 나라의 여론을 좌지우지할 만큼 사회에 미치는 파급력이 엄청나다. 그래서 언론을 입법, 사법, 행정부에 이어 제4부라 일컫고 하나의 권력으로 간주하기까지 한다. 언론에서 다뤄지는 특정 사건은 개인이나 법인에는 돌이킬 수 없는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언론이 사실을 오보하거나 내용을 과장해서 보도한다면 보도 삭제, 반론 보도, 심지어 소송으로 구제받는다 해도 원상회복은 쉽지 않다.

이처럼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언론 기사는 무엇보다도 정확한 사실(fact)을 바탕으로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도해야 할 책무가 있고, 독자의 흥미만을 자극하려 선정주의에 치우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 언론인에게는 높은 도덕성과 윤리의식, 책임감이 요구된다. 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의 적용 대상에 언론인까지 포함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요즘에는 가짜뉴스(fake news)까지 온라인 공간에서 기승을 부려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 가짜뉴스는 말 그대로 내용이 거짓인 뉴스다. 기사 형식만 취해 특정 언론사가 작성한 기사로 둔갑한 사이비 기사다. 이는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위법 행위로, 국민의 판단을 흐리고 여론을 호도한다.

작금은 온갖 정보가 홍수를 이루는 인터넷 시대다. 거짓 정보가 판을 치는 이런 세상에 사는 우리로서는 공신력 없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경계해야 한다. 아무쪼록 사물(事物)을 바라보는 시각이 왜곡되지 않고 올바른 세계관을 형성할 수 있도록 그 어느 때보다 옳고 그름의 분별력과 혜안(慧眼)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문심명 집사
국회 상임위원회 근무
25남전도회

위 글은 교회신문 <516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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