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훌] 막말이 난무하는 세상

등록날짜 [ 2017-08-22 15:21:32 ]

수해로 고통받는 지역주민을 외면하고 관광성 외유를 떠난 도의원이 이를 비판하는 국민을 ‘설치류(들쥐, 레밍)’에 빗대 비난하면서 큰 파문이 인 적이 있다. 또 모 국회의원은 학교 급식 종사자를 ‘밥하는 동네 아줌마’라 폄하하고, 파업 중인 사람들을 ‘미친X’이라고 원색적으로 욕을 해 사퇴 압력을 받기도 했다.

막말이나 말실수 때문에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받는 유명인이 계속 나오지만, 교훈을 얻지는 못한다. 이것을 보면 왜 인격이 저 정도밖에 안 되고, 또 기자들 앞에서 막말을 해서 화(禍)를 자초할까 의문이 들지만, 우리도 일상에서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 철학자들은 인간이 언어적 존재라고 말하는데 인간의 말은 동물과 차원이 다르다. 인간은 말을 통해 의미뿐 아니라 감정을 전달하고, 말로 사람을 얻거나 말 때문에 사이가 틀어지고 원한을 사기도 한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거나 ‘세 치 혀가 사람을 죽인다’는 속담도 있다. 말은 행동 못지않게 중요하며, 저주와 축복의 도구이자 심판의 대상이다. 성경은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7)고 말을 경계한다. 그럼 막말이나 설화(舌禍)가 발생하는 원인은 무엇이고, 그것을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말실수가 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말로 상처를 주거나 치명적 재앙을 부르기도 한다. 말실수는 깊이 생각하지 않거나 무심코 내뱉는 말이라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인간관계를 망가뜨리거나 엄청난 화(禍)를 부르기도 한다.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자 왕좌를 다투던 이복형 아도니야는 솔로몬에게 순복하면서도 보답으로 아버지 다윗의 시중을 들던 여인 아비삭을 달라고 요청했다. 형으로서 할 만한 요구처럼 보이지만, 이 말에 깔린 아도니야의 불순함을 간파한 솔로몬은 그를 죽인다.

말실수가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한다. 유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여자 후배가 있었는데 좀 덜렁거리는 점이 흠이었다. 어느 날 나들이를 갔는데 그날 그 친구는 준비해 오기로 한 중요한 도구를 깜박했다. 미안해하는 후배에게 “네가 하는 일이 늘 그렇지 뭐”라고 무심코 말했는데 순식간에 얼굴이 빨개지더니 눈물을 줄줄 흘려 몹시 당황한 적이 있다. 난 가볍게 면박을 주려고 했지만, 부지불식간에 근본적인 자존감을 건드린 것이다. 모두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말실수는 숨겨진 무의식적 욕망이나 사고의 표현이기에 진실을 반영하기도 한다. 우리 의식은 체면이나 겉치레 때문에 절제하지만 말실수는 의식의 틈을 뚫고 감추고 싶은 본심을 드러낸다. 말실수를 피하려면 마음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 필자의 말실수도 우연처럼 보이지만 실은 후배의 덜렁거리는 점을 못마땅하게 여긴 평소 감정이 슬며시 드러난 결과다.

잘못된 말이 생기는 둘째 원인은 습관이다. 편한 사이나 가족, 교회 같은 친밀한 공동체에서는 조심하지 않고 평소 습관에 따라 말을 하다가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무뚝뚝하고 예의 없는 말투나 직설적 농담, 좋지 않은 태도 등은 의도를 반감하거나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필자가 아는 교수 한 분은 말투가 분명하지 않고 늘 반말 비슷하게 말을 끝내는 습관이 있는데 이런 말투 때문에 여러 번 곤경에 처했다. 대학원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경상도 억양이 잔뜩 섞인 반말 투로 강의를 진행하다 항의를 받기도 했다. 또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같은 과 여학생에게 ‘졸업하고 뭐 할 일 있나?’ 하고 별생각 없이 질문했는데 이 학생이 자기가 여자라 교수가 깎아내린다고 성희롱으로 해석해 소동이 난 적도 있다.

말이 지나치게 많거나 남의 말을 가로채는 습관도 상대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대부분 사람이 말 습관에 신경을 쓰지 않지만, 낭패를 당하지 않으려면 잘못된 습관을 고쳐야 한다.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지(無知)다. 자기가 하는 말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파문을 낳을지 잘 생각하지 않거나 특정한 장소나 시기에 어울리는 예의나 예절을 잘 알지 못하면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한다. 그런데 무지도 자세히 보면 태만이나 평상시의 잘못된 믿음을 고치지 못하는 고집에서 비롯된다. 선악과를 따 먹은 죄를 질책하시는 하나님께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 하고 핑계를 댄다. 죄를 지은 후 전형적으로 보이는 책임회피나 임기응변적 뻔뻔함이 아담의 말대답에 있다. 하지만 이 말에서 자신의 죄를 창조주의 탓으로 돌리는 악한 모반의 마음과 핑계가 전혀 소용없음에도 그것에 의존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볼 수 있다. 무지는 실수나 책임을 정당화할 수 없고 오히려 원죄를 더욱 심각하게 만든다. 무지를 피하려면 끊임없이 성경과 책을 보고 자신을 반추(反芻)해 보아야 한다.

이 외에도 무심코 내뱉는 비속어, 부정적 표현, 비난, 조롱 같은 잘못된 말로 인한 설화(舌禍)가 많다. 사람에게 말로 상처를 주면 평생 그것을 잊지 못하게 되며, 때로 물리적 폭력보다 더 심한 고통을 줄 수 있다. 행동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말에 더 조심하고 좋은 습관을 들여야 한다. 우리의 혀가 분쟁과 저주를 나르는 칼이 아닌 화목의 도구가 되게 하자.


/김석 집사
철학박사(프랑스 현대철학)
現 건국대 융합인재학부 교수
신문발행국 논설부장


 

위 글은 교회신문 <540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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