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칼럼] 부활절에 하고 싶은 사랑

등록날짜 [ 2015-03-30 16:41:06 ]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어디까지일까 반성하는 시간

작은 사랑 실천부터 시작하는 진정한 사랑의 실천

 

 

3월 21일 ‘세계 산림의 날’을 맞아 경기도 포천 국립수목원에서 1분 이상 나무를 안아 주는 ‘나무 껴안기’ 행사가 열렸습니다. 1226명이 참여함으로써 참가 인원 부문에서 기네스북 기록이었다고 합니다. ‘나무 껴안기’를 하는 목적은 나무와 인간의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것이었지요. 대상을 사랑하려면 적어도 공감이 우선이니까요, 이렇게 자연을 사랑하려는 노력은 나날이 늘어나는데, 정작 인간을 사랑하려는 노력은 점점 메말라 가는 추세가 요즘 세상인 것 같습니다.

 

며칠 전 노량진 학원에 다니며 재수하는 아들이 귀가한 후 저의 손을 조용히 끌어당겼습니다. 그러면서 말하더군요. 며칠 전 비 오던 날, 귀갓길에 노량진 학원 근처를 지나다 비를 맞고 앉아 있는 한 거지 아저씨를 보았답니다. 불쌍한 마음에 아저씨에게 우산을 주고 왔다지요.

 

아들은 그 후에도 거지 아저씨를 만날 기회가 몇 번 더 있었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아저씨의 상황이 너무나 불쌍했답니다. 그래서 하루는 컵라면을 사 드리며 예수를 전했다지요.

 

“우리 교회를 안내하고 내 전화번호를 줬어. 교회 모시고 가려고.”

 

이 말을 마친 아이의 얼굴엔 전도자로서 자부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저의 머리에 떠오른 광경은 낯모르는 사내의 전화를 받고 나가 으슥한 곳에서 뭇매를 맞으며 어디론가 끌려가는 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너 돌았니? 그 사람이 누군 줄 알고 네 번호를 줘?”라는 외침이 저의 입에서 비명처럼 터졌습니다. 저는 온갖 비극적인 상황으로 도배된 위험성을 제시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네가 어떻게 감당한다는 거니? 그렇게 함부로 아무나 전도하는 것이 아냐!” 저의 예상 밖 태도에 당황한 아들이 묻더군요.

 

“엄마, 가난한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것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의 도리인데, 제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그 질문에 갑자기 답변이 궁색해졌지요. “아무튼 그런 사람은 네가 감당 못 해. 전도사님이나 목사님들이, 아니면 그룹 전도를 해야 해.” 세상이 위험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여전히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하는 아이에게 낯선 전화를 받지 말라고 거듭 당부했습니다.

 

그날부터 고민에 빠진 것은 저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어디까지인지를 자문자답했습니다. 아들에게 충고하던 내 마음이 떳떳치 못한 까닭은 왜인지 고민했습니다. 강도 맞아 쓰러진 사람을 구원하던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사랑하라고 왜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는지….

 

생각해 보면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며 산 지 오래지만 사랑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한 적은 별로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간증으로 듣는 위대한 사랑은 그저 남의 이야기일 뿐, 저와는 상관없는 일로 치부해 온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위험하다는 핑계로 세상에 칸막이를 세우며 작은 사랑을 너무 잊고 산 것은 아니가 하는 생각이 엄습했습니다. 거지를 ‘하나님 사랑의 대상’으로 본 아들을 칭찬하며 전도 방법을 알려 주기는커녕 “네 신앙이 틀렸다”고 마음의 상처를 주었으니 말입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씨앗의 희망』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하루는 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 바닥에서 작은 싹들이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해에 땅에 떨어진 씨앗에서 돋아난 연약한 싹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그토록 수명이 긴 나무의 시작치고는 얼마나 미약한가!”

 

거대한 숲의 원동력이 보잘것없는 작은 씨앗에서 시작된다는 것, 이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의 원동력과 일치합니다. 이처럼 큰 사랑도 작은 사랑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자처하는 우리가 그런 사랑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다른 것이 더 귀하게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귀한 것을 지키다 보면, 진정한 사랑은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내가 매일매일 죽노라”고 했나 봅니다. 사랑은 죽는 일인가 봅니다. 오늘 나를 죽이는 것만큼 내가 사랑할 수 있나 봅니다.

 

벌써 사순절 중반에 다가갑니다. 올해 맞이한 부활절 기간엔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모습은 어떠한지 확인하며 그것을 사랑으로 증거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먼저 아들에게 사과해야겠습니다. “넌 잘한 거다. 엄마가 사랑이 너무 없었어”라고….

윤은미 집사

방송작가

서울장신대 ‘교양독서와 논술’ 출강
 

위 글은 교회신문 <428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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