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44)] 예수께서 이적을 행하신 가나와 가버나움
인류 구원을 위한 공생애 시작을 알린 역사적인 현장

등록날짜 [ 2016-07-11 13:06:41 ]

<사진설명> 가나 혼인 잔치 돌 항아리.

윤석전 목사(연세중앙교회): 예수님은 가나 혼인 잔치에서 맹물을 포도주로 만드는 첫 이적을 보이셨습니다. 이 사건을 실제 사실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천지만물을 지으시고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역사하시는 전능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능히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공생애 시작을 알리는 첫 이적을 보이신 갈릴리 가나 지역을 살펴보겠습니다.


가나(Cana)는 나사렛 북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는 예수님이 보이신 첫 이적인 ‘포도주 사건’을 기념하는 교회가 있고, 교회 지하에는 당시 사용했을 듯한 돌 항아리가 있다. 이것은 정결 예식 때 물을 담는 데 사용했던 평범한 항아리다. 하지만 예수께 쓰임받자 이것은 메시아의 권능을 담은 거룩한 도구가 됐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들과 함께 초대된 결혼 잔치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그 결혼 잔치가 파하기도 전에, 포도주가 떨어져 혼주들이 난감해하자 예수께서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게 하셨다. 그 항아리 물을 잔에 담자 그것은 곧 포도주로 변했다. 포도주가 없어 낙망해하던 연회장(宴會長)은 예수님께서 전하신 포도주를 마시고는 그 맛에 감탄한다. 이 이적을 본 제자들은 예수께서 메시아이심을 처음으로 믿게 된다. 그 역사가 살아 있는 현장에서, 예수님의 이적 앞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제자들의 심정을 되새겨 본다. 결국 가나 혼인집 이적은 인류 구원 사역의 신령한 후사(後嗣)가 되기 위해 제자들이 가야 했던 여정의 서막이었다.



윤석전 목사: ‘가나’ 지역은 당시 어떤 곳이었습니까? 또 지금 모습은 어떠한가요?

홍순화 원장(한국성서지리원): ‘가나’는 ‘나다나엘의 고향’이라고 요한복음에 기록돼 있습니다(요21:2). 또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이적뿐 아니라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표적도 보이신 곳입니다(요4:43~54).

현재 ‘가나’라고 여겨지는 장소가 두 군데 있습니다. 첫째는 나사렛에서 6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나사렛과 가까워서 예수님께서 쉽게 이동하셨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보통 성경에 언급한 지역을 찾을 때, 성경 이름과 비슷한 지명을 찾아 그 장소라고 칭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지역의 원래 이름이 ‘칸나’였기에 성경 속 ‘가나’라고 추정합니다. 그리스정교에서 이곳에 기념 교회를 지었고, 천주교에서도 교회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은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16km 떨어져 있는 ‘키르벳 카나(Khirbet Qana)’를 ‘가나’라고 주장합니다. 둘 중 한 곳은 분명히 옛 가나 지역이 맞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 이적이 일어난 장소가 어디냐가 아니라 ‘가나’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의 의미입니다.


윤석전 목사: 저도 가나 혼인 잔치 기념교회에 갔다가 돌 물동이를 보았습니다. 그 당시의 물 항아리라고 여겨지지 않았지만, 주님이 첫 이적을 나타내신 장소라고 생각하니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일어난 예수님의 이적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까?

박성민 목사(한국대학생선교회 CCC대표): 그 의미는 요한복음 자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물이 포도주로 변한 사건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처음 표적’이라고 했습니다(요2:11). 표적은 이적과 관련 깊은 단어이며, ‘사인’이라는 뜻으로 표적 이후의 무언인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요?

칼슨이라는 학자는 요한복음 1장 전체 중 일곱째 날에 표적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여섯’은 알다시피 성경에서는 불완전한 수인데, 예수께서 돌 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부으라 하시자 그 물이 모두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그다음에는 요한복음에 ‘새로운 성전’ 얘기가 나옵니다. 이어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새로운 탄생’, 즉 ‘거듭남’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가나의 표적은 단순히 물이 포도주로 바뀐 사건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말한 바와 같이 포도주의 풍성함은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모든 것이 새롭게 바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사도 요한은 가나 혼인 잔치의 이적을 ‘처음 표적’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요한복음 2장 11절에는 예수님께서 가나 이적을 보이신 직후 제자들이 ‘믿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습니다. 또 예수를 따르던 수많은 무리도 예수를 ‘믿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믿음의 종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박성민 목사: 참 어려운 부분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에서 사용한 ‘믿었다’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의미와 약간 다릅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셔서 그 영광을 나타내실 때 ‘믿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요2:11).

일반 사람들은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나옵니다. “…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요2:23~24). 같은 ‘믿음’을 기록했지만, 제자들은 표적을 통해 나타난 영광을 보면서 ‘믿었고’, 일반 사람들은 표적 자체, 즉 나타난 겉 현상만 보고 ‘믿었다’고 한 데서 믿음의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지속적으로 믿음의 단계를 밟으면서 예수님에 대한 예(禮)가 깊어지고, 예수님과 관계가 열릴수록 믿음이 점점 더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 안에 거하고, 서로 사랑하고, 삶 속에서 그 열매를 맺는 것, 이 세 가지를 믿음의 표식으로 나타냈습니다.


윤석전 목사: 예수께서 가나 혼인 잔칫집에서 이적을 행한 후 많은 치유 이적을 나타내셨고 그로써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치유 역사가 많이 일어났던, 베드로 집터와 가버나움 회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갈릴리 호숫가 북서쪽, 예수님의 갈릴리 선교 거점이었던 가버나움에는 베드로 집터와 1905년 발굴한 예수님 당시 사용한 회당이 있다.

교회의 반석으로 예수님께 선택받았던 베드로는 천국 열쇠를 예수께 받는 복을 얻었고, 현재 기독교 역사 속 수장(首長)으로 우뚝 서 있다. 현재 가버나움은 폐허된 벌판 위에 유적의 잔해와 돌무더기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곳에 세워진 팔각형 기념교회 아래 베드로 집터로 여겨지는 거룩한 장소가 있다. 이곳에서 예수께서는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셨고 중풍 병자를 낫게 하셨다(마8:14~15). 또 베드로 집 근처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께선 귀신 들린 자와 손 마른 자를 고쳐 주셨다. 이곳에서 하셨던 예수님의 권세 있는 설교와 치료의 역사를 통해 제자들은 메시아인 하나님 아들의 실체에 더욱 다가갔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6~17).



<
사진설명> 베드로 집터.

윤석전 목사: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 마태.마가.누가복음)를 보면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에서 많은 이적을 나타내셨습니다. 베드로의 집터에 관해 말씀해 주세요.

홍순화 원장: 가버나움은 주전 2세기부터 주후 11세기까지 사람이 살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습니다. 당시 가버나움은 폭 300m, 길이 300m 규모였습니다. 인구는 1000명 정도에 세관과 회당이 있는 번화한 곳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집터라고 여겨지는 장소에는 주후 1세기부터 교회로 사용하던 집이 있습니다. 교회로 사용할 정도로 특별한 장소여서 ‘베드로의 집이 아니었을까’ 추측하다가 이후 ‘베드로의 집이 틀림없다’고 믿었습니다. 5세기 무렵 그 터에 교회를 세웠고, 최근에는 팔각형 기념교회를 세웠습니다. 베드로 집터 옆에는 가버나움 회당이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예수께서 여러 방법으로 치유 이적의 역사를 나타냈다고 합니다.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홍순화 원장: 예수님이 이적을 행하실 때, 말로 하실 때도 있었지만 어루만져 주실 때도 있었습니다. 또 안수하시거나 직접 행동을 요구하실 때도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소경인 자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사건이 그 예입니다(요9:5~7). 그와 같은 여러 방법으로 이적을 일으킨 모습이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구약을 보면 엘리사도 문둥병자인 아람 사람 나아만 장군에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라고 행위를 요구했습니다(열하5:5~14). 공관복음서를 보면 특히 치유 역사가 많이 나타나는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요구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박성민 목사: 헬라어의 특성과 관련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헬라어에 ‘소조’라는 단어가 있는데 ‘영혼을 구원하다’와 ‘고침받다’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병을 낫게 했을 때 ‘구원받았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병에 걸렸을 때, 특히 문둥병이 발했을 때 본인의 죄와 연결돼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죄와 병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하실 때 단순한 육체적 고침이 아니라 영혼 구원까지 연결된 특별한 이적이 많았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시 사람들이 원하는 바를 아시기에 그에 맞는 다양한 이적을 행할 수 있으셨지만, “내가 온 것은 건강한 자를 구하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5:31). 물론 이 구절을 보면 육체적인 아픔을 치유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의미로 자신의 부족함, 영적인 부패함을 보고 마음이 가난한 자들이 천국의 주인이 되는 것과 같은 뜻으로 말씀하셨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도 이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아픔과 관련한 말씀을 봤을 때 우리 인간의 고통을 예수님께서도 그대로 느끼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 중 육체의 고통이 우리에게 가장 가깝습니다. 예수께서 치유해 주심으로 육체적 고통에서 구원을 받고, 더 나아가 영혼 구원까지 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치유 사역을 하시면서 복음도 전하셨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윤석전 목사: 병든 자를 고치고 치료하는 이적을 나타냄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하고 믿음 속에서 그 영혼이 예수 앞에 돌아와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셨다는 말씀이군요. 그런 이적과 표적을 일으키시는 예수님을 좇는 제자들의 성품과 태도는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박성민 목사: 성경을 보면 매우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열두 제자는 그런 무리에게서 예수님을 보호하고자 했을 터입니다. 예수께 무작정 다가가려는 적극적인 사람들을 아주 거칠게 밀어냈을 것입니다. 한편, 제자 중 상당수는 예수께서 주신 권위로 말미암아 부각되었던 듯합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눅9:1~2).

제자 요한이 예수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눅9:49)라고 말하자 예수께서는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다” 하시며 그들의 관점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후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갈 때 받아 주지 않자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사마리아인)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는 말을 합니다(54절). 몹시 거친 듯한 언사이지만 자신들의 특별한 위치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고 여겨집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제자들 사이에서 ‘누가 큰 자냐?’ 하는 변론이 일었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에서 제자들의 본래 성격이 많이 드러나 있지만, 십자가 사건 이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 불가능이 있습니까? 병들어 있습니까? 온갖 고통과 악한 영에 매여 있습니까? 주님은 지금 당신 옆에 와 계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으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하시고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하시니 따르는 표적으로 확실히 말씀을 증거하더라”(마16:17~18).

하나님 말씀은 지금도 살아 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모든 불가능을 주님께 구하고 그의 말씀으로, 그의 능력으로 해결해서 육체는 건강으로, 마음은 평안으로, 영혼은 속죄의 은총으로 구원받아 영원한 행복이 출발되기를 바랍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8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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