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 ‘성서의 땅을 가다’(98)] 마사다와 엘라 골짜기 전투의 교훈

등록날짜 [ 2018-02-06 15:04:16 ]

악한 영과 싸움에서 절대 물러서지 말아야
어떤 전쟁이든 승리는 하나님께 달려 있어


윤석전 목사: A.D. 73년 로마군이 유대인의 최후 항거지 마사다를 점령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967명의 싸늘한 주검이었습니다. 신앙의 자유와 독립을 외치다 죽은 유대저항군은 2차와 3차 유대전쟁의 원동력이 됐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적 중심지, 국가관이 서려 있는 마사다로 가보겠습니다.

A.D. 73년 5월 3일 새벽 로마군은 제1차 유대전쟁의 최후 저항지 마사다를 점령했다. 무너진 성벽을 밟고 성안으로 들어갔을 때 로마군을 맞이한 것은 유대저항군 시체 967구였다. 당시 성은 로마군이 쏜 돌 폭탄에 초토화됐지만 성안 수로에는 물이 넘쳤고, 창고에는 식량이 가득했다. 이것은 식량이 부족해 죽었다는 오명(汚名)을 거부하는 유대 저항군의 마지막 항전 흔적이었다.

현재 이스라엘 청소년은 투철한 마사다 저항 정신을 배우려고 걸어서 마사다 요새에 오른다. 또 매년 이스라엘 방위군 장갑부대 신병들이 충성을 맹세하고, 청소년들은 맹세 선서식을 한다. 이런 운동은 젊은이들이 2000년 전 로마에 저항한 조상의 기상을 이어받아 지도자 자질을 익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현재 테러 위협에 놓인 이스라엘 청소년은 “마사다는 다시 무너지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민족 비극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로마에 항거하던 마사다의 마지막 전사(戰士)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죽음을 택했다. 그들의 정신은 역사 속에 꺼지지 않는 민족자존(自存)의 불씨가 됐다. 마사다는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영향력을 과시한다.

<사진설명> 이스라엘 청소년과 군인은 매년 마사다에 올라 맹세 선서식을 한다. “마사다는 다시 무너지지 않는다”고 선언하면서 민족 비극을 절대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윤석전 목사: 마사다에서 967명이 최후에 죽음을 맞았는데 그들의 국가관과 신앙관은 어떠했는지요?

왕대일 교수: 마사다는 ‘국가가 있어야 개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현장입니다. 요즘 우리는 개인주의에 매몰됐지만 국가가 있어야 개인이 사는 것은 변함없습니다. 마사다는 ‘국가도 하나님 신앙의 나라여야 개인이 산다’는 것을 깨닫는 현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윤석전 목사: 쿰란 공동체 유대인과 마사다 유대인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왕대일 교수: 쿰란에 살았던 에세네파 유대인은 금욕주의자이며 메시아가 오기를 고대했습니다. 그들은 사두개파(Sadducees)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지키던 유대인은 ‘어둠의 자식’, 자신들은 ‘빛의 자식’이라 칭하며 경건한 생활을 한 은둔주의자입니다. 이에 비해 마사다에 은신한 유대인들은 열심당(Zealots)입니다. 그들은 로마 압제에 칼과 총으로 맞서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시대는 비슷했지만 신앙 태도나 로마에 항쟁한 방식에서 당시 유대인은 다양한 모습을 지녔습니다.

윤석전 목사: 로마인이 예루살렘을 파괴한 후 유대인은 어디로 갔나요?

왕대일 교수: A.D. 73년에 유대인이 항쟁했습니다. 하지만 A.D. 100년이 지난 후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자취를 감췄다가 A.D. 200년쯤 바벨론에 나타납니다. 정치적으로는 지배받아도 사회적으로는 자유로운 바벨론에서 공동체를 형성해 유대 사회를 이뤘습니다.

윤석전 목사: 유대인은 바벨론에서 단체 생활 규칙을 담은 중요한 문헌을 만들었다는데 소개해 주세요.

왕대일 교수: 유대인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토라와 탈무드라는 두 종류의 책이 있습니다. ‘토라’는 우리가 아는 구약성경이고, 탈무드는 유대의 역사가, 랍비, 정신적 지도자들이 토라를 풀고 해석한 책입니다. 탈무드는 두 개로 집대성됐는데 구전 율법을 모은 ‘미쉬나’와 미쉬나를 해설한 ‘게마라’가 있습니다. 유대 땅은 잃었지만 바벨론에서 신앙의 자유를 깊이 내면화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윤석전 목사: 이스라엘 저항의 상징물 마사다에는 어떤 유물이 있는지요?

오택현 교수: 마사다는 헤롯왕이 반란이나 전쟁이 일어날 때 피하려고 만든 요새입니다. 그런데 요새 기능보다는 겨울철 중앙 산악 지역에 비가 많이 올 때 휴양을 겸한 겨울별장으로 썼습니다. 이곳에 헤롯왕의 화려한 궁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3층으로 된 궁 흔적을 보면 ‘이런 곳에 어떻게 저런 시설을 지었을까’ 싶을 정도로 화려합니다. 또 헤롯왕은 그곳에서 목욕 시설과 사우나 시설을 많이 이용했는데 지금 사용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좋은 시설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을 보면 최후에 남은 유대인 967명이 마사다에서 어떻게 자결했는지 나와 있습니다. 그 기록의 진위여부로 많은 논쟁이 있었는데 이를 종식할 발굴이 있었습니다. 부스러진 질그릇 조각 11개가 발견됐습니다. 조각들에 적힌 이름 중에는 ‘벤 야이르’가 있었습니다.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Eleazar Ben Yair)는 마사다 항전을 이끈 유대인 열심당 지도자입니다. 마사다 최후의 날에 이 질그릇 조각에 이름을 적어 최후에 자결을 도울 사람 10명을 택하는 제비뽑기로 사용한 것이 아닐까 추정합니다. 질그릇 조각은 요세푸스의 기록을 역사적으로 실증하는 중요한 단서로 가장 중요한 마사다 유물입니다.

<사진설명> (왼쪽) 마사다 최후의 날 질그릇 조각에 이름을 적어 자결을 도울 사람 10명을 고를 때 제비뽑기로 사용한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마사다에서 어떻게 자결했는지 알려주는 요세푸스 기록의 역사적 실증물로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마사다 유물이다. (가운데)토라 모세 오경을 말한다. (오른쪽)탈무드 유대 역사가, 랍비들이 토라를 풀고 해석한 책이다.

윤석전 목사: 마사다는 산악지대인데 물과 식량을 어떻게 충당했나요?

오택현 교수: 마사다는 산악지대일 뿐 아니라 로마 사람이 3년간 포위한 상태였습니다. 마사다는 헤롯왕이 반란이 일어났을 때 숨을 요새로 만들어서 최소 5년 이상 버틸 수 있도록 물과 식량을 비치해두었습니다. 마사다에서 죽은 유대인 967명이 3년을 먹고도 남을 식량이 있었습니다. 마사다는 겨울에 가끔 비가 오는데 헤롯왕은 그 비를 한 방울도 버리지 않고 보관하도록 저수 시설도 만들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헤롯왕이 만들어 놓은 시설 덕을 톡톡히 보았습니다.

윤석전 목사: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쳤던 엘라 골짜기는 믿음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의 운명이 갈린 그곳으로 가보겠습니다.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엘라 골짜기는 다윗과 골리앗의 역사가 살아 있는 땅이다. 어린 목동 다윗은 블레셋 맹장(猛將) 골리앗과 맞대결을 했다. 다윗은 골리앗에게 선포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삼상17:46). 그 후 다윗은 골리앗을 향해 달리면서 주머니에서 물맷돌을 꺼내 던졌고 골리앗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 결전의 이야기가 엘라 골짜기에 살아 있는 역사로 남겨 있다.

<사진설명> 엘라 골짜기는 지중해안 지역과 유대 산악지역 중간에 있는 세펠라 평원 지역의 일부다.

<사진설명> 엘라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평야 같은 들판이다. 엘라 골짜기를 점령하면 베들레헴까지 점령할 수 있어 중요하다.


<사진설명> 엘라 골짜기에서 다윗과 골리앗이 맞대결했다. 세펠라 평원에는 블레셋 사람이, 유대 산악지역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살았는데 두 지역 중간에서 전쟁이 났다.


 

윤석전 목사: 엘라 골짜기의 특징을 말씀해 주세요.

오택현 교수: 엘라 골짜기는 예루살렘에서 브엘세바로 내려가기 전에 지나는 곳입니다. 지중해 지역과 유대 산악지역 중간에 있는 세펠라 평원 지역의 일부입니다. 세펠라 평원에는 블레셋인, 유대 산악지역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살았습니다. 전쟁은 두 지역 중간에서 완충지 역할을 하던 세펠라 평원에서 일어났습니다. 소렙, 스바다, 라기스 등 많은 골짜기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엘라입니다. 엘라 골짜기를 점령하면 베들레헴까지 공격할 수 있어 중요한 지역입니다.

윤석전 목사: 엘라 골짜기는 평야 같은 들판이라 싸울 때 서로 대면해야 합니다. 그 시대는 항상 평야에서 전쟁을 했는지 궁금합니다.

오택현 교수: 만일 산에서 전쟁했다면 유대가 블레셋에 비해 약하다는 의미입니다. 엘라 골짜기보다 더 낮은 평지에서 전쟁을 했다면 블레셋이 약세에 있을 때입니다. 둘 사이가 호각지세(互角之勢)였다면 가운데 있던 엘라 골짜기와 세펠라 평원에서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은 길목인 엘라 골짜기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왔지만 골리앗의 위세에 눌려 꼼짝 못 하고 있었습니다. 골리앗 입장에서도 사울이 위로 쳐올라온다면 블레셋의 피해도 만만치 않기에 골짜기로 내려오게 한 후에 전쟁하려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욕한 것입니다. 그러던 중 다윗이 형들을 면회 왔습니다. 하나님을 욕하는 골리앗을 보자 흥분하고 신앙을 재무장한 후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 하며 골리앗에 맞서 싸워 승리했습니다.

윤석전 목사: 보통 물맷돌하면 물속에서 나온 돌인데 당시 물맷돌은 어떠했는지 말씀해 주세요.

왕대일 교수: 이스라엘 목자들이 사용한 물매는 돌을 담는 가죽보와 두 가닥이 연결되는 가죽끈이 있었습니다. 가죽보에 돌을 놓고 목표를 향해 두 줄을 잡아 돌리다 한 줄을 놓습니다. 그러면 가죽보에 쌓인 돌이 튕겨 나가는데 속도가 시속 150km에 달합니다. 다윗이 사용한 물맷돌은 파괴력이 대단한 ‘목자의 물맷돌’이라고 추정합니다.


<사진설명> [다윗의 물맷돌] 가죽보에 쌓인 돌이 튕겨 나가는 속도는 시속 150km에 달한다.

윤석전 목사: 골리앗, 다윗, 엘라 골짜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왕대일 교수: 저는 엘라 골짜기에 서서 사무엘상 17장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엄청난 사건을 떠올리면서 제 마음에 교훈을 새겼습니다. 먼저 다윗이 물맷돌로 칼과 창을 휘두르는 장수 골리앗을 무너뜨렸는데 다윗에게 물맷돌은 신무기가 아니라 평상시 양을 지키려고 사용하던 돌이었습니다. 나라가 위태한 지경에 빠졌을 때 다윗이 사용한 것은 평상시 자주 쓰던 달란트였는데 그것이 엄청난 사건을 일으킨 이적의 씨앗이 됐습니다. 또 다른 것은 엘라 골짜기에는 사울 군대와 골리앗 군대뿐이었는데, 군인이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어린 목동 한 명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갔을 때 불리한 전세를 뒤집는 놀라운 승리를 가져왔습니다. ‘내가 골짜기에 서 있는 그 한 사람이 돼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윤석전 목사: 어떻게 해서 무장한 장수 골리앗이 물맷돌에 맞아 죽었나요?

<사진설명> [블레셋 유적지에서 발견된 블레셋 군인 모습을 양각한 토판.] 골리앗이 썼다고 추정되는 블레셋 군인의 투구에는 얼굴을 방어하는 막이 없다.

왕대일 교수: 골리앗은 블레셋 군대를 대표하는 장수로, 다윗은 사울의 군대를 대표하는 자로 나왔습니다. 칼과 화살이 난무한 상황이 아니라 1대 1로 싸웠습니다. 또 골리앗의 무장을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에도 나오지만 고고학 유물을 보면 골리앗이 썼다고 추정되는 투구에는 얼굴을 방어하는 것이 없습니다. 일대일로 맞선 상황에서 다윗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시속 150km의 물맷돌을 던졌을 때 이마를 맞췄습니다. ‘다윗이 던졌지만 맞춘 것은 하나님이시다’는 은혜를 깨닫습니다.

윤석전 목사: 유대인은 로마에 저항하면서 국가관과 신앙관을 보여줬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것은 로마에게 굴복하지 않았다는 증거요, 정신과 영적인 승리입니다. 또 다윗과 골리앗 사건에서 다윗은 초라한 목동이지만 블레셋 대장수 골리앗을 무너뜨린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 이적이었습니다. 두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지 배웠습니다.


<계속>
<윤석전 목사 탐사기행 ‘성서의 땅을 가다’는 
www.ybstv.com에서 시청할 수 있습니다.>

 



 

위 글은 교회신문 <563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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