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전 목사와 함께하는‘성서의 땅을 가다’(225·下)] 예수께 책망받은 성읍‘가버나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땅(48)

등록날짜 [ 2022-02-09 09:08:14 ]

예수께서는 가버나움 중심으로

전도하고 수많은 이적 보이셔

복음 전도의 전초 기지였으나

예수께 회개 없는 성읍이라며

고라신·벳새다와 함께 책망받아



 ‘갈릴리(Galilee)’ 북쪽 해안을 달리면 납달리 지파의 성읍 ‘가버나움(Capernaum)’이 나온다. 예수님은 ‘나사렛(Nazareth)’을 떠나 가버나움에 오셨고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수많은 이적을 베푸셨다. 예수님 당시 가버나움은 매우 번화해 많은 사람이 살았는데, 그때의 모습을 기억하듯 베드로 동상이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 주셨고, 이를 기념하는 기념교회가 팔각형으로 세워졌고 베드로 집터 유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사진설명> 가버나움 회당. 예수께서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읽고 가르치셨고, 백부장의 종과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주시는 등 수많은 이적을 행하셨다. 가버나움은 복음 전도의 중심지였으나, 회개가 없는 성읍이라고 고라신, 벳새다와 함께 책망받기도 했다.



<사진설명> 가버나움 주변 지도. 가버나움은 갈릴리 해변가에 있다. ‘긴네렛’에서 북쪽으로 3~4㎞ 떨어져 있고, ‘벳새다’에서 서쪽으로 7㎞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 주변은 인구 밀집 지역이었고,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배를 타고 주변 지역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다.


<사진설명>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 기념교회. 예수님은 이곳에서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셨고, 그것을 기념하고자 베드로 집터 위에 팔각형의 기념교회를 세웠다.



윤석전 목사: 가버나움 회당은 예수님께서 많은 것을 가르치고 이적을 행하신 중요한 곳입니다. 지리적으로 가버나움을 소개해 주세요.


홍순화 교수: 가버나움은 갈릴리 해변가에 있습니다. ‘긴네렛(Kinnereth)’에서 북쪽으로 3~4㎞ 떨어져 있고, ‘벳새다(Bethsaida)에서 서쪽으로 7㎞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또 인근에 있는 ‘디베랴(Tiberias)’도 중요한 곳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갈릴리를 ‘디베랴 바다’라고도 말합니다. 당시 이 지역 중심도시이자 헤롯 안디바의 수도가 디베랴였고, ‘디베랴 앞에 있는 바다’라는 뜻으로 디베랴 바다라고 부른 것입니다. 가버나움은 디베랴의 북쪽에 있습니다. 가버나움 가까이에 해변도로가 지나가고 있고 그 당시 중동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기에 검문소와 세관도 있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납달리 지파의 성읍 가버나움에서 어떤 사건들이 일어났는지 자세히 알려 주세요.


왕대일 교수: 구약성경에는 구체적으로 거론되는 사건이 없고,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지명입니다. 예수께서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과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또 가버나움에는 시몬 베드로의 집이 있었습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에도 가버나움이 언급되는데,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1차 유대전쟁(주후 66~73년)을 할 때 요세푸스가 지도자로서 전쟁을 이끌다가 로마 군대에게 큰 부상을 입는데 그 상처를 치유한 곳이 가버나움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많은 이적을 행하셨으나, 가버나움은 회개하지 않은 도성이라며 책망을 받기도 했습니다.


윤석전 목사: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가장 많은 이적을 행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홍순화 교수: 예수님 당시 갈릴리 주변은 인구 밀집 지역이었습니다. 인근에 해변도로가 지나가는 데다 갈릴리 바다 또한 중요한 교통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서 배를 타고 주변 지역을 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고, 가버나움은 육상교통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갈릴리 바다를 통한 해상교통의 중심지였기에 이곳에서 집중적으로 일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많이 머물고 역사하셨으므로 하나님의 역사가 가장 많이 일어난 곳이 되었습니다.


윤석전 목사: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이적을 행하시면서 자기 생애에 많은 시간을 납달리 지역에서 복음 전하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전도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왕대일 교수: 가버나움에서 본격적으로 고고학 발굴을 시작한 시기는 1968년인데, 이때 이후로 가버나움에 예수님의 흔적이나 업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1968년부터 1985년까지 18차례에 걸쳐 발굴이 이루어져 여러 유물과 유적을 발견했는데, 성경에 나오는 시몬 베드로의 집도 찾아냈습니다.


시몬 베드로의 집을 가 보면 큰 마당이 3개 있습니다. 마가복음 2장에 나오는 기사를 읽어 보면 베드로의 집에서 예수님이 치유 사역을 행하실 때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을 만한 앞마당으로 연결되는 마당이 세 개 있었고, 많은 방이 그 마당 주위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 방 두 개가 가정교회로 사용된 흔적을 찾아냈습니다. 그 방들에는 마루가 깔려 있고 회반죽으로 반죽을 해서 벽과 천장에 발라 놓았는데 가정교회 용도였습니다.


사도 시대 때도 가정교회로 사용되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주후 1세기 무렵 성지 순례하던 사람들이 그 가정교회를 찾아온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벽마다 아람어, 라틴어, 시리아어, 헬라어 등으로 쓴 글들을 발견했는데 자기네 나라 말로 이 땅을 찾은 순례자들의 감회를 적어 놓은 것입니다. 주후 1세기경부터 순례객에게 큰 은혜의 장소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버나움의 베드로 집이 당대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되고 오늘날까지 기독교 역사에 소중한 곳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베드로가 자기 집을 예수님께 내놓았고 사도시대가 시작되면서 베드로의 집이 가정교회가 되었기 때문이리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집을 가정교회로, 내 집에 예수님 말씀이 거하도록 하는 사모함이 있었기에 가버나움에서부터 로마에 이르기까지 전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내 집에 예수님 오십시오. 예수님 말씀하십시오. 내 집이, 내 가정이 교회가 되게 하겠습니다”라는 열정이 있을 때 선교의 역사가 일어나리라 기도해 봅니다.


윤석전 목사: 가버나움에 있던 베드로의 집이 가정교회로 사용되었다고 하셨는데 그 가정교회가 어떻게 이어졌는지 궁금합니다.


왕대일 교수: 주후 4세기경, 로마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베드로의 집에 있던 가정교회를 요즘 우리 식으로 말하면 리모델링한 듯합니다. 고고학적인 자취를 찾아보니 지붕을 돔형으로 올리는 등 주후 4세기의 흔적이 발견됩니다. 또 마루를 새로 깔고 집 북쪽의 방 하나를 따로 떼어 놓아 성물을 두는 성소 형태로 연결을 시키는 등 그렇게 해서 4세기, 5세기 될 때까지도 성지 순례하는 사람들이 찾아온 곳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오스만 터키, 이슬람교 세력이 그 지역을 장악하면서 주후 7세기가 지나면 없어지고 맙니다.


윤석전 목사: 구약 시대 납달리 지파의 땅에는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룬 사건을 많이 볼 수 없었으나 신약 시대에 와서는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영적인 사건, 이적의 사건이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수많은 역사를 보고 경험하고도, 하나님을 깊이 알고자 하는 지식이 없던 탓에 주님께 책망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는 어떤 질병에서 치료받는 것보다 큰 것이요, 어떤 사건보다 큰 것입니다. 지옥에서 벗어나 천국에서 영원히 살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더 큰 이적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마음을 절대 아프게 하지 않도록, 주님과 더불어 신령한 은혜를 누리고 감사하면서 이 소식을 끝까지 전하여 예수님이 가진 생애를 우리를 통해 끝없이 재현하는 복된 역사만 있기를 원합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735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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