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안과 밖 이야기] 인간은 참사랑을 베풀 수 없는 존재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등록날짜 [ 2015-01-05 15:14:33 ]

율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사건



소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알려진 누가복음
1025~37절 말씀은 기독교 구원관을 잘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25절은 마치 율법사가 예수의 성경 실력을 테스트하는 것 같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10:25).

실제로 신약성경 곳곳에 이 같은 질문이 많이 나타나 있다. 부자 청년의 질문이나 니고데모의 질문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 유명한 요한복음 316절도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3:16).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율법사의 질문에 구약성경에 나온 그대로 답하셨다. 율법을 지켜 행하면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10:26~28).

예수는 율법을 온전히 지킨다는 것의 실례와 동시에 인간은 참마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고 역설적으로 가르치려 한 것 같다. 특히 유대인이 율법 정신은 망각하고 형식적으로 지키는 모습, 즉 외식하는 모습이 매우 많았다는 사실을 꼬집어서 말씀하고 있다.

유대인이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의 마음에 들 정도로 이웃을 사랑할 수 없다는 점을 예수께서는 이미 알고 계셨다.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율법을 배운 제사장도, 레위인도 피 흘리며 죽어 가는 이웃을 피하여 지나가고 말았다. 물론 그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지극히 당연하며 평소 그들의 생활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시체에 손을 대지 말라는 율법을 귀가 닳도록 배우고 또 배워 왔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에게 고하여 이르라 백성 중의 죽은 자로 인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려니와”(21:1).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말지니 부모로 인하여도 더러워지게 말며”(21:11).

그런데 율법에는 큰 계명이 있고 작은 계명이 있다. 이 두 계명이 대립할 때에는 언제나 큰 계명을 지켜야 한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22:36).

시체에 손을 대지 말라는 계명이 성경에 있지만 동시에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도 있다. 그렇다면 왜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 두 계명 사이에서 고민하거나 갈등하지 않았을까?

오히려 이방인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이,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던 유대인보다 아니 제사장과 레위인보다 훨씬 더 율법의 정신을 살리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베풀었다. 여기서 우리가 잘 모르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사마리아인도 자신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인이라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현재 유대인은 2000여 년간 전 세계에 흩어져 사느라고 피가 섞였지만, 사마리아인은 오히려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도 여러 전쟁과 환난으로 현재 약 600명만 존재하고 그나마도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려다 보니 가까운 친척끼리 결혼할 수밖에 없어서 많은 유전병으로 고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도 사마리아 성경, 즉 사마리아 오경을 가지고 안식을 지키며 자녀에게 성경을 철저하게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예수의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인도 하나님을 잘 믿었으며, 성경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비유이지만 사마리아인도 시체에 손을 대지 말라는 율법을 매우 잘 알았다. 그런 그가 강도를 만난 현장에서 그보다 큰 계명인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실천한 것이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선을 행하라는 점에 있다기보다는 인간 본성이 약하여 참사랑을 베풀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말씀하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유대교의 랍비나 바리새인들만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근본적으로 선을 행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부각하게 하려는 말씀이셨다.

결론적으로 영생을 얻는 길을 물으러 온 어떤 율법사는 예수의 질문을 받고 정답을 이야기했지만, 문제는 과연 그가 사마리아인처럼 율법을 지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영생을 얻는 길이 유대인에게나 모든 인간에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이 비유에서 알 수 있다.

위 글은 교회신문 <41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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