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 믿음의 사람들 <19> 최성업 목사
역경 딛고 조국에 복음의 불길 지펴

등록날짜 [ 2010-03-02 11:45:58 ]

공산화된 중국과 러시아 돌며 교회 순회

최성업 목사는 1888년 3월 25일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태어나 유교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랐으며 그의 나이 12세 되던 1900년에 러시아 땅 새초봉이란 곳으로 이사해 러시아 학교에 입학하여 18세 되던 해에 졸업했다.

한창 젊은 나이에 성공의 길을 걷고 있던 최성업은 1908년 3월, 경흥과 간도 구역을 순회하던 펜윅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듣게 된다. 28세에 하나님을 믿게 된 최성업은 교회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러시아 어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때부터 전도인으로서 그의 삶이 시작되어 많은 사람을 교회로 이끌었다.

하루아침에 예수에 미쳐 있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던 가족들, 특히 아버지인 최응선 씨는 그를 정신병자로 취급하기도 하고 서양귀신에 빠졌다고 하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그를 예수에게서 빼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어떤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더욱 따뜻한 마음으로 가족들을 대하면서 그들을 위해 뜨겁게 기도했다. 이러한 기도를 주님께서 받으시고 1909년 가족 모두가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게 된다.

공산화된 러시아로 들어가 교회 순회
1922년에 최성업은 감로 안수를 받았으며, 중국 교회 개척 책임자인 총찰의 사명을 받고 파송되어 각 지역에 있는 교회를 순회하면서 예배를 인도하고 전도도 하면서 흩어진 교회들을 성실하게 돌보았다. 그러나 이때 러시아는 정치적인 파벌싸움으로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공산화되었다. 모든 교회는 큰 압박을 받았고 전도의 길도 막혔다.

1927년 최성업 감로는 위험을 무릅쓰고 러시아로 떠났다. 시베리아와 만주 등지에는 공산주의자들의 침입으로 방화와 학살이 자행되고 있었고, 이곳에 살던 한국인들은 본국으로 피난을 오고 있었다. 이러한 위험 상황 속에서도 최성업 감로는 러시아에 있는 교회를 순회했으며 공산주의자들에게 순교당한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장사 지낸 후 10개월 동안 교회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무참히 짓밟히는 모습을 목격하고 돌아와야 했다.

일제 탄압과 전쟁에도 굴하지 않은 전도 생활
1935년 최성업은 이종근 목사의 주례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해에 일본정부는 신사참배를 강요하며 한민족을 압박했다. 최성업 목사는 만주 지역을 순회하면서 교회를 돌보고 또 교회를 개척했다. 일제의 무서운 탄압 속에서도 꿋꿋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면서 10년 동안 만주 지역의 교회를 돌보는 데 최선을 다했다.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되면서 1946년 청진교회를 개척하고 사역하였으며 이후 나진, 중산동, 동천교회에서 목회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부산으로 내려온 최성업 목사는 이후 대전 대흥교회를 개척하고 침례교단의 사회부장으로 봉사했으며 1954년 대전에서 열린 총회에서 부총회장으로 피선되어 교단의 발전을 위해 봉사하였다. 1957년 노후의 몸을 이끌고 강릉교회를 개척하여 사역했으며 수원중앙교회로 부임하여 사역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최성업 목사는 온갖 고난에도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한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정리 김은혜 기자
/자료출처 <한국침례교인물사>

위 글은 교회신문 <18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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