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남 이승만, 그의 생애와 업적(10)] 선교사들의 노력과 이승만의 석방
조선의 운명은 점점 어두워져만 가고…

등록날짜 [ 2013-03-26 16:03:36 ]

 
<사진설명> 이승만이 한성 감옥에서 쓴 한시 모음집 <체역집>과 <감옥잡기>.

이승만이 감옥에서 고생하는 동안 선교사들은 이승만을 석방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했다. 1900년 겨울, 고종 황제는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적당한 시기에 이승만을 석방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지키지 않았다. 이후로도 고종 황제는 여러 차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승만의 배재학당 스승 아펜젤러도 제자 이승만을 살리고자 여러 선교사와 연합하여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끈질기게 구명 활동을 벌였다. 이승만이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편향한 것을 염려해서 그러다가 목이 달아날 것이라고 경고했던 아펜젤러였지만, 이승만이 한국 기독교를 이끌어 갈 거목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선교사이자 스승의 심정으로 아펜젤러는 감옥에 갇힌 이승만뿐 아니라 곤란을 겪고 있던 이승만의 가족에게도 담요와 땔감을 보내 보살펴 주었다.

아펜젤러는 이승만을 석방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끝내 제자의 출옥을 보지는 못했다. 성경 번역을 하고자 배를 타고 서울에서 목포로 가던 중 선박 충돌 사고가 일어나 목포 앞바다에서 익사했기 때문이다. 배 두 척이 부딪치는 순간까지 아펜젤러 선교사는 안전했지만, 위험에 처한 학생들을 구출하려다 생명을 잃었다. 사람은 살아온 모습 그대로 죽는다. 아펜젤러가 맞은 최후는 제자들을 사랑했던 스승, 한국인을 사랑했던 선교사의 일생이 축약된 장면이었다. 옥중에서 아펜젤러의 순교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식사도 거른 채 온종일 통곡했다.

아펜젤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선교사들은 이승만 구명 운동을 계속했다. 그들이 쏟은 노력과 한규설의 후원으로 1904년 8월 7일, 이승만은 5년 7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이처럼 선교사들이 조선 국왕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이유는 고종 황제와 맺은 특별한 관계 때문이었다. 언더우드, 애비슨, 헐버트라는 세 선교사는 명성 황후 시해 사건으로 친일파가 궁중을 장악할 때, 매일 궁중에 드나들며 고종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밤에는 당직을 서가며 고종을 보호했다. 고종이 생애 최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선교사들은 음으로 양으로 고종을 도왔다. 고종에게 최고의 은인인 선교사들이 알렌 공사와 함께 이승만이 출옥하도록 요청한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선교사들이 이승만을 살리려 한 노력이 사실 규정 위반이었다는 점이다. 1897년 5월 11일 미국 정부는 셔만(Sherman) 국무장관 명의로 훈령을 내렸다. 미 정부는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선교, 교육, 의료 사업을 제외한 토착 정치에 절대로 개입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알렌 공사와 미국 선교사들은 정치범 이승만을 감옥에서 나오게 하려고 내무협판에게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훈령을 위반하면서까지 노력을 기울였다.

이처럼 미국 선교사들은 본국 정부가 내린 훈령을 어기면서까지 이승만을 두둔했다. 그만큼 이승만에게 거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다. 선교사 학교를 졸업한 조선인 천재가 언론계와 정치계를 종횡무진 누비다가 감옥에서 진실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난 이야기는, 선교사들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신 감동적이며 전형적인 이야기였다.

게다가 감옥에서 조선 사회 상류층 40여 명을 기독교로 이끌고, 학교를 세우며, 도서관을 운영하고, 논설을 쓰는 등 일취월장하는 이승만에게서 선교사들은 조선의 미래를 보았다. 조선에 복음을 자라게 할 중심인물로 이승만을 지목한 것이다. 훗날 펼쳐진 역사로 비추어 볼 때, 그들이 짐작한 예감은 적중했다.

1900년 8월 8일에 <황성신문>에 ‘청자(請者)나 절자(絶者)나’라는 제목으로 논설이 실렸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청한 놈이나 거절한 놈이나’ 정도로 읽을 수 있다. 기사는, 러시아가 일본에 한반도를 둘로 쪼개어 나누어 지배하자고 제안했는데 일본이 거절했다는 내용으로, 일본 혼자서 한반도를 다 먹겠다는 심보를 비판했다. 한마디로 청한 놈이나 거절한 놈이나 남의 나라를 물건처럼 주고받으려는 도둑놈들이라는 논설이었다. 정부는 곧 <황성신문> 사장 남궁억을 구속했다. 이 사건은 우리 역사에 신문 기사로 말미암아 언론인이 구속된 첫 필화(筆禍) 사건이다.

<황성신문> 보도가 보여주듯, 조선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승만이 출옥할 무렵에 일본 공사가 황제와 면담을 요구했다. 고종이 거절했지만, 일본은 막무가내로 면담을 진행했다. 황제가 일개 외교관이 청한 요구를 거절하지도 못할 만큼, 나라는 혼란을 지나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승만은 자유를 얻었지만, 조선은 자유를 잃어가고 있었다.
조선을 삼키려는 러시아와 일본의 속셈이 점점 드러나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 정부가 나름대로 생각해낸 해결책이 있었으니, 곧 미국에 원조를 구하는 것이었다. <계속>

위 글은 교회신문 <33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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