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훌] 기독교, 비호감에서 호감으로 가는 길
소통 이유로 정체성 잃지 않아야 참교회

등록날짜 [ 2010-02-01 13:35:18 ]

“전도를 한 번이라도 받아 본 종교는?”이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80%가 기독교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중 믿고 싶은 마음이 드는 종교는?”이라는 질문에는 겨우 20%만이 기독교를 선택했다고 하니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에게 비호감인가 보다. 교회가 사회를 위한 일은 하지 않고 너무 교세확장에만 열을 올려서 그런 것 아니냐고도 하지만 그런 것만도 아니다.

아무리 잘해도 핍박받는 기독교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최근 공개한 ‘한국교회의 사회적 섬김 보고서’를 보면 대(對)사회 섬김 활동에 있어서 기독교는 타 종교에 비해 월등히 앞서 있다. 사회복지사업 관련 법인현황에서 기독교는 절반 이상인 52.5%를 차지했고, 종합사회복지관 운영 주체의 45.4%가 기독교 단체였다. 그 외에 지역 아동센터의 53.1%, 종교 법인이 운영하는 사립학교의 71.7%가 기독교 법인으로 파악되었다. 한국교회는 사회에서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타 종교에 비해 많은 공헌을 했음에도 신뢰도나 호감도가 나아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이렇게 기독교는 사회에 좋은 일을 많이 하고도 항상 세상의 따가운 시선과 심한 핍박까지 받아야 하는가? 이런 현상이 유독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니며 기독교 내부에서만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타협할 수 없는 절대 진리
성경은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행4:12)고 하였고, 예수께서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요 14:6)고 하셨다.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는 구원을 위한 절대적 진리이기에 영혼 구원에 있어서 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바로 이런 절대 진리에 대한 지나친 확신과 그것을 강요하는 기독교인들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나 어리석고 오만하고 무례하게 보이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기독교에 대한 비호감의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더욱이 지금은 절대 진리를 거부하며 모든 것들을 상대적으로 보는 포스트모던 시대이기에 기독교에 대한 반발은 더 심하다. 그에 반하여 타 종교는 어떠한가? 자신들의 종교뿐 아니라 타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인정하며 타 종교에 대한 배려와 화합을 위해 노력하는 종교라는 좋은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킨다. 그리고는 은근히 기독교도 이 일에 동참하라고 손을 내밀고 있으니 얼마나 신사적이요, 멋진 모습으로 보이겠는가?

종교다원주의라는 늪
그러나 만약 기독교가 사회적 소통과 종교 간의 갈등 해소를 위해 타 종교를 구원의 한 방편으로 인정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니 곧 종교다원주의(多元主義)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과연 양심 있는 기독교인으로서 선뜻 받아들일 수 있는 문제인가? 기독교인들은 절대 진리를 가진 자로서 항상 공손한 태도와 설득할 수 있는 논리로 믿지 않는 자들을 진리로 인도해야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쳐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는 종교다원주의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
종교다원주의 속에는 예수가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없다. 예수를 역사 속의 인물로는 인정하지만 나를 죄에서 구원하신 구세주, 신앙의 대상으로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예수’를 분리시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않는다. 종교다원주의 안에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같은 하나의 종교일 뿐이다. 같은 교회 안에 있다 해도 종교다원주의자는 완전히 다른 예수를 믿는 것이다.

세상과의 충돌 속에서 건재한 교회
교회는 구원의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예수라는 절대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요, 비호감은 물론 혹독한 고난과 핍박, 심지어는 목숨까지 내어놓고 이 진리를 전하고 끝까지 지켜야 한다. 결코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싸움을 하는 곳이다. 그런데 만약 교회가 핍박과 고난의 길을 회피하고 절대 진리를 전하는 진검승부를 피한다면 결국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게 될 것이다. 복음은 그 색깔과 농도가 희석되어 세상을 살릴 수 있는 생명력을 잃게 될 것이고 종교다원주의와 같은 자멸의 늪에 빠져 교회는 더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중단하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교회는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구원선(救援船)이 아닌 믿는 자끼리 모여서 즐기는 유람선(遊覽船)으로 바뀌게 될 것이고 결국은 거대한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고 말 것이다.
바라건대, 교회는 어떠한 이유로도 본질을 잃어서는 안 되고, 본질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세상과의 소통의 기회를 놓쳐서도 안 된다. 세상과의 충돌을 겁내지 않고 진리로 대적하여 승리하는 교회가 참교회이다. 초대교회는 복음을 위해 당하는 어떠한 핍박도 기쁨으로 이겨내었다. 그러하였기에 교회는 부흥되었고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교회도 세상과의 소통에 있어서는 뱀처럼 지혜롭게 유연한 모습으로, 절대 진리를 지키는 데 있어서는 비둘기처럼 순결한 모습으로(마 10:16) 이 세상과의 충돌을 견뎌내야 한다. 비호감이 되기를 두려워하는 겁쟁이보다는 세상을 향해 진리를 속 시원히 외치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왕비호감이 훨씬 멋지지 않은가? 

위 글은 교회신문 <177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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