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훌] 손원일 제독과 해군 첫 전투함 ‘백두산함’

등록날짜 [ 2018-06-29 14:14:07 ]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은 38선 전역에 걸쳐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북한 특수부대가 후방 교란 목적으로 바다로도 침투했다. 강원도 동해안 옥계, 정동진, 금진 등에 북한 766특수부대와 549육전대(우리나라 해병대에 해당) 총 1800명이 상륙했다. 묵호 경비 부사령관은 육군과 경찰 연합 전투부대를 편성해 맞섰으나 장기간 전쟁 준비를 해온 적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바로 그 시각 북한 특수부대 600명을 태운 1000t급 소련제 무장수송선이 부산을 향하고 있었다. 부산항을 점거해 일본에 주둔 중인 미군의 진입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

6.25 발발 한 해 전인 1949년 6월,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은 ‘함정건조갹출위원회’를 구성해 해군 장병들을 대상으로 모금 운동을 벌였다. 장교는 봉급의 15%, 병조장은 10%, 하사관과 수병은 5%씩을 떼기로 하자 모두 기꺼이 동참했다. 양복수선비를 아끼고 고철을 팔며 보태기도 했다.

이렇게 모금한 돈 1만5000달러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하면서 전투함 한 척을 사 달라고 청원했다. 이 대통령은 국고에서 4만5000달러를 손원일 제독에게 보태줬다. 총 6만 달러로 함정과 포탄, 포, 연료, 수리비, 인건비를 다 충당해야 했다.

손원일 제독은 미국으로 건너가 1949년 10월 7일, 1만8000달러를 주고 만재 배수량 450t, 최고 속력 18노트인 화이트헤드 호(號)를 샀다. 화이트헤드 호는 몹시 낡아 녹이 많이 슬었을 뿐 아니라 기관을 움직여 본 지가 2∼3년은 족히 되어 보였다.

인수 요원 15명은 중위에서 중령까지 모두 장교였다. 이들은 경비 지출을 아끼고자 배에서 숙식하면서 낮에는 페인트칠, 기관 수리 등 잡일을 했다. 함정 수리가 끝나고 12월 26일, 한국 해군 최초 전투함정인 백두산함의 명명식이 열렸다.

백두산함은 하와이에서 3인치(76mm) 대포 한 문(門)을 사 장착하고, 괌에서 3인치 포탄 100발과 기름을 산 뒤 대한민국으로 향했다. 1950년 4월 10일, 뉴욕을 떠나 석 달 반 동안 대서양과 태평양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백두산함이 드디어 진해 기지(基地)에 모습을 드러냈다.

손원일 제독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은 돈(3만 6000달러)으로 퇴역 군함 3척을 더 구매했다. 이 군함들을 수리하는 중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손원일은 손정도 목사의 장남이다. 손정도 목사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자, 상해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으로 활동했다. 그 후 만주 길림에서 교회를 세우고 선교 활동을 하던 중, 일본 경찰의 고문 후유증으로 1931년 병사했다.

“우리나라가 살길은 바다에 있으니 바다를 지키는 방법을 배우라”는 아버지 말에 따라 손원일은 상해 중앙대학교 항해과로 진학했다. 졸업 후 22세 때인 1930년 7월 16일 중국해군부(中國海軍部) 시험에 응시해 해군보관(海軍補官)이 됐고 세계 항해에 나선다. 인도양을 건너던 중에 부친의 부고를 듣게 된다.

손원일은 광복 후 귀국해 8월 21일 해사대(海事隊)를 조직, 11월 11일 해안경비 담당 ‘해방병단(海防兵團)’을 설립했다. 해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병학교를 설립하여 해군 병력을 양성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에 의해 1948년 9월 5일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한다.
1950년 6월 25일 해군 본부의 명령에 따라 진해 기지에서 출발한 백두산함은 오후 6시38분, 부산 앞바다 오륙도 등대 오른쪽으로 3.4km 떨어진 해상을 지났다.

오후 8시12분, 막 어둠이 깔리려고 하던 바다에 검은 연기가 보였다. 백두산함보다 덩치가 3배가 큰 수송선이었다. 라이트를 이용하여 국제신호 규정에 따라 30분 동안 국적, 출항지, 목적지를 되풀이하여 물어보았으나 응답이 없었다.

25일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 신성모 국방장관에게서 “백두산함이 접촉 중인 선박이 공산군 함정으로 판단되면 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참모총장 직무대행 김영철 대령은 26일 0시10분 백두산함에 사격 명령을 내렸다. 2시간가량 치열한 공방전 끝에 새벽 1시38분경에 적선이 침몰했다고 해군본부에 보고했다. 아군 피해는 전사 2명, 중상 3명, 경상 5명이었다.

부산지역에 북한 특공대 600명이 상륙했다면 어떠했을까. 당시 남한에서 군수물자를 하역할 수 있는 부두 시설을 가진 곳은 부산밖에 없었다.

서울이 함락된 6월 28일, 미군 수송선들이 부산항에 속속 들어왔다. 그 수송선에는 105mm 박격포 10만 5000발, 81mm 박격포 26만 5000발, 60mm 포 8만9000발, 총탄 248만 발이 실려 있었다. 7월 1일에는 미국 스미스 부대가 미군 440명을 싣고 부산항을 통해 들어왔고, 7월 2일에는 미군 34연대, 7월 3일에는 미군 21포병 부대가 들어왔다. 6.25전쟁 중에 자유우방 16국으로부터 연 병력 100만 명과 수많은 군수물자가 부산항을 통해서 한국에 온 것이다. 미·북 회담 후 ‘평화’ 무드가 조성되고 있다.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이루어지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통일을 이뤄 북한 동포들이 해방되는 그날까지 손원일 제독처럼 미래를 준비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정한영 안수집사
신문발행국


위 글은 교회신문 <581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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