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론과 훌] 비극을 부르는 오해와 의심

등록날짜 [ 2018-07-12 12:02:55 ]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오셀로>
오해 때문에 사랑하는 아내 죽이고
진실 밝혀지자 죄책감에 목숨 끊어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도 다윗 의심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다
뿌리박힌 신앙 교만에 처참한 최후


한 번 오해 생기면 의심 더 깊어져
믿고 싶은 것만 믿는 ‘확증편향’ 태도
오해하고 있다면 자신 먼저 돌아봐야

 

오해(誤解)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그릇되게 해석하거나 뜻을 잘못 앎 또는 그런 해석이나 이해’라고 나온다. 살다 보면 오해 때문에 벌어지는 크고 작은 비극을 경험할 때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인 <오셀로>는 오해 때문에 사랑하는 부인을 죽이고 나중에 모든 사실이 밝혀지자 죄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흑인 장군 오셀로의 슬픈 파멸을 다룬다. 오셀로의 부하 이아고는 부관이 되지 못하자 앙심을 품고 오셀로의 부인 데스데모나의 손수건을 훔쳐서 오셀로의 부관 캐시오의 방에 떨어뜨리고 둘이 밀통을 나눈다고 거짓 고변을 한다. 사랑하는 부인의 말을 믿지 않고 불륜의 증거라고 가져온 손수건만 보고 오셀로는 분노로 길길이 뛰다 성급하게 부인을 죽인다. <오셀로>는 의심과 오해가 어떻게 사람 사이를 갈라놓을 뿐 아니라 파멸시키는지 복잡 미묘한 인간의 심리를 생생하게 묘사한 비극이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기 시작한 것은 블레셋과의 전쟁 후 백성 사이에 다윗의 인기가 높아지면서부터다. 사무엘상 18장 8절을 보면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면서 다윗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사실 다윗은 왕좌를 넘보지 않았고 충성심도 변함없었으나 한 번 시작된 사울의 오해는 풀리지 않았고 결국 죽을 때까지 다윗을 죽이려고 시도했다.

그런데 흔히 오해는 오해받을 만한 일이 있어서 생기는 것 같지만 실상은 반대다. 대개의 경우 문제가 있기보다는 오해하는 사람 속에 숨은 의심이나 열등감 같은 부정적 정서가 촉발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한 번 오해가 생기면 의심은 더 깊어지고 자기 신념과 판단에 부합되는 자료만 믿는 경향이 점점 굳어지는데, 심리학에서는 이를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자신의 믿음에 부합되는 증거는 받아들이지만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자료나 사실은 무시하면서 자신의 판단을 바꾸지 않는 태도다.

오해가 생기면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확증편향이 일단 자리 잡으면 애초 신념을 더 굳어지게 해서 증오나 불신으로 눈을 멀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이제 오해가 풀리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오셀로의 사례에서도 간교한 이아고의 꼬드김이 불화를 일으킨 것 같지만 실은 오셀로가 자신이 흑인이고 아내는 베니스의 손꼽히는 백인 미녀라는 점에 대한 근본적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오해가 생긴 것이다. 이아고는 이 열등감을 파고들어 틈을 벌려 오셀로의 질투심에 불을 붙인 것뿐이다. 사울은 왕이었지만 하나님의 영이 자신을 떠났다는 두려움이 있었기에 백성이 다윗을 칭찬하자 그가 왕위를 노린다고 단정했다.

정서적으로 건강하고 긍정적인 사람은 오해할 상황이 돼도 이를 다시 확인해 보려고 하며 잘 미혹되지 않는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끝까지 다윗을 믿고 도와준 것은 그가 선한 사람일 뿐 아니라 다윗에 대한 우정이 컸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같이 일을 하다 보면 크고 작은 일로 오해가 생기거나 서운함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오해가 풀리지 않는 것은 서로에 대한 불만이나 부정적 정서를 바로잡지 못하고 그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의 오해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결국 오해하는 사람의 심리구조가 더 큰 문제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먼저 형제와 화해한 후 예물을 드리라(마5:24)고 말한다. 오해와 불신은 죄악이고 건강하지 못한 심리의 파산물이다. 내가 누군가를 오해하고 있다면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 오해였다고 핑계 대지 마라. 오해도 죄악이다.



/김석 집사
現 건국대 철학과 교수
철학박사(프랑스 현대철학)
신문발행국 논설부장



 

위 글은 교회신문 <58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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