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나의 믿음이 망상이라면

등록날짜 [ 2013-01-22 11:44:46 ]

막연한 기대감으로 사는 건 아닌지
나를 돌아보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매미 소리와 태양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던 지난 8월, 그를 처음 만났다. 한국인 표준 신장보다 5센티미터 정도는 커 보이는 그는 꽤 멋진 청년이다. 적당히 나온 배 때문에 날씬해 보이지는 않지만, 뚱뚱하지도 않다. 첫인상으로는 거리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청년이다.

표정은 언제나 맑다. 고생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것 같다. 근심 걱정이 그를 피해 숨어 버린 것 같다. 한편으론 가벼워 보이기도 한다. 사물을 꿰뚫어 보는 강한 시선도, 날카로운 눈빛도 없다. 쌍꺼풀이 없는 평범한 눈매 때문은 아닌 것 같다.

그는 마흔네 살 중년이다. 나보다 두 살 아래지만, 그는 나를 ‘아저씨’라 부른다. 그는 30대 초반이라 해도 전혀 의심 가지 않을 외모다. 세상에 시달린 흔적이 없다. 행동은 거인처럼 느리지만 건장해 보인다.

그는 정신분열병(조현병) 환자다. 구체적인 증상은 ‘망상’이다. 가끔 혼자서 웃는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자신의 몸이 허공에 떠 있는 걸까. 웃는 표정이 ‘정신’을 옆 책상에 잠시 놓은 것 같다. 정신보건 사회복지사는 내게 조언했다.

“망상에 빠지는 순간이 길수록 현실 적응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그를 흔들어 깨울 수 있게 현재성 있는 대화를 많이 하라.”

나는 화요일마다 그를 만났다. 장소는 정신 장애인들이 사회에 진출하도록 돕는 ‘임파워먼트 센터’다.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려면 15일간 현장 실습을 마쳐야 한다. 나는 자격증을 따려고 의무적으로 출근했지만, 그는 어떤 심정으로 매일 그곳을 드나들까?

임파워먼트 센터에는 정신 장애인 약 50명 정도가 주간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사회에 진출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사회는 이들을 삐딱한 눈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들은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이코패스 같은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순한 양 같은 성격을 지녔다. 이들 중에 나를 아저씨라 부르는 ‘그’가 있다. 그는 4급 한자시험을 준비 중이다. 1시간을 집중해서 한자 쓰기 연습하고 시험을 보면, 10문제 중 2개 이상 틀린 적이 없다. 때로는 UCC 제작을 위해 ‘배우’로도 기꺼이 나선다.

주어진 시간과 환경 속에서 온 힘을 다하는 그를 보았다. 하지만 그가 사회 진출에 성공하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려면, 자신의 힘으로 높은 벽을 넘어야 한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벽을 넘으려 하는 생각과 의지가 없다는 점이다. ‘벽’이라는 것조차 인지(認知)하지 못한다.

그와 함께한 4개월, 문득 ‘그’를 통해 ‘나’를 발견했다. 몸에 좋은 ‘약’을 먹기 싫어하는 아들에게 억지로라도 먹이려는 어머니의 심정을 모르는 철없는 아이처럼. 벽 속에 갇힌 나를 발견했다. 주님은 오늘도 기도회를 열어 놓고 기도하기를 바라지만, 이를 무시하고 있는 내가 보인다.

기도해야 세상을 이긴다고 애타는 심정으로 말하지만, 벽을 넘으려고 하는 생각과 의지가 없는 ‘그’처럼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고 있다. 그러면서 천국 갈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 속에 있는 믿음이 혹시‘망상’이라면 이를 어쩌해야 하나.


/정한영 기자

위 글은 교회신문 <322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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